빨간날 사라지길 바라는 아이... "아예 없애면 어떨까"

[인터뷰] 신작 <나의 빨간날>의 비영역공작단 이지민 대표

 신작 '나의 빨간날'을 제작한 비영역공작단의 이지민 대표 프로필
▲신작 '나의 빨간날'을 제작한 비영역공작단의 이지민 대표 프로필이지민

"세상의 빨간날들 다 사라져 버려!"

만약 어린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어른들은 그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선물을 받을 수도 있는 날인데. 어른들이 생각하는 '빨간날'은 대개 어린이에게 기다려지는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날이 즐겁지 않은 어린이도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처럼 모두가 행복해야 할 것 같은 날에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모두에게 특별하다고 정해진 날이 정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특별한 것인지 질문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는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꿈밭극장에서 공연하는 비영역공작단의 신작 <나의 빨간날>은 바로 이런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초등학교 5학년 재이는 어느 날 세상의 빨간날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공연은 그 아이가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됐는지를 따라간다.

지난 15일 대학로에서 만난 비영역공작단 이지민 대표는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만들면서도 '어린이의 마음'을 쉽게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어린이를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만나고 싶었다는 뜻이다. 연습실에서는 배우들이 움직임과 대사를 반복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장면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어린이날이 싫은 어린이도

 연극 '나의 빨간날' 공연 연습 장면
▲연극 '나의 빨간날' 공연 연습 장면비영역공작단, 아르코 제공

<나의 빨간날>은 이 대표가 글방 수업에서 '기념일'을 주제로 짧은 산문을 쓰면서 시작됐다. 달력을 들여다보니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념일이 있었다. 누구나 아는 국가적인 기념일부터 세계 고양이의 날, 세계 왼손잡이의 날, 세계 해적처럼 말하기의 날처럼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날까지 다양했다.

"무엇을 기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도 생겼고요. 그러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념일까지 다시 보게 됐습니다."

생각은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 같은 익숙한 '빨간날'로 이어졌다. 누구라도 즐거워할 것 같은 날이지만 이 대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어린이날이 늘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날'이라는 말 때문에 오히려 누군가는 더 외롭거나 소외됐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일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같은 생각과 감정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더 외롭게 느끼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그렇다면 세상의 빨간날을 아예 없애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상상까지 가게 됐죠."

이 질문에서 초등학교 5학년 주인공 '재이'가 만들어졌다. 재이는 세상의 빨간날이 싫지만 작품은 그 이유를 처음부터 설명해 주지 않는다. 여러 존재와 사건을 만나면서 재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유가 조금씩 드러난다. 다만 여러 존재와 사건을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대표가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경계한 것도 '어린이라면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린이를 순수하고 천진한 존재로만 바라보거나, 반대로 미숙해서 어른이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시선 모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린이도 서로 다른 환경과 관계 속에서 각자의 생각과 취향을 가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뒤집어보는 걸 좋아해요. 작품을 만들 때도 '나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나'라고 계속 질문합니다. 어린이에 대해서도 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계속 흔들려고 해요."

그가 자주 떠올리는 말은 "어린이를 만나되 어린이에 갇히지 말자"다. '어린이는 이럴 것이다' 또는 '어린이는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앞세우기보다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렇게 만난 어린이는 어른이 미리 만들어놓은 '어린이다움'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가 된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때 어린이였지만 그것만으로 지금의 어린이를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이 대표는 자신이 어린이였던 시절과 지금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문화와 기술, 관계 맺는 방식과 언어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래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금 어린이의 마음과 너무 쉽게 겹쳐놓지 않으려 했다.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고 해서 지금의 어린이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의 어린이에게 제가 배워야 할 것도 많고요.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어린이를 너무 쉽게 같은 존재로 연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 궁금해하는 것"

 연극 '나의 빨간날' 공연 연습
▲연극 '나의 빨간날' 공연 연습비영역공작단, 아르코 제공

<나의 빨간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지점은 말로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마음이다. 어린이는 자신의 감정을 적절한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때 어른이 너무 빨리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면 복잡했던 마음이 '슬픔'이나 '화', '외로움' 같은 하나의 감정으로 단순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대표는 재이의 마음을 말로 모두 설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재이 자신조차 바로 알아채거나 이름 붙이기 어려운 마음을 빛과 움직임, 소리와 사물 같은 무대의 감각으로 옮긴다. 관객이 작품 속 재이의 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만나고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어린이의 말이 어른의 언어로 너무 쉽게 해석되면서 그 감정이 납작해질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재이가 바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을 굳이 하나의 감정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관객이 자기 감각으로 만나고 상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제는 묵직하지만 공연의 주요한 언어는 유머와 놀이다. 책에서 익숙하게 만났던 위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생각지도 못한 존재들이 엉뚱하게 등장한다. 사실적인 공간을 재현하기보다 빛과 사물, 소리와 배우의 몸이 서로 만나면서 새로운 이미지와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도 특징이다.

이 대표는 공연을 본 어린이와 어른이 같은 장면에서 같은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했다.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누군가는 재이의 마음을 따라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주 작은 장면이나 사물 하나를 오래 기억할 수 있다. 공연이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가 어린이에 관한 작품을 만들면서 끝까지 붙잡는 태도 역시 '잘 모르겠다'는 데 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계속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것이 제가 어린이를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고 작품 속 인물을 만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공연을 본 뒤 부모가 아이에게 정답을 확인하듯 "무슨 내용이었어?"라고 물을 필요도 없다. 서로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는지, 무엇이 기억에 남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가 오히려 부모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 대화 끝에 작품이 처음 시작했던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나의 빨간날은 어떤 날일까.'

세상의 달력에 정해진 기념일이 아니라 나에게 특별한 날은 무엇인지 떠올려보는 질문이다.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지만 자신에게만은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 아주 작은 순간일 수도 있다.

"꼭 지금 당장 말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날을 한번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에서 만난 질문이나 감각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다시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요."

<나의 빨간날>은 어떤 날이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는 공연이 아니다. 남들이 모두 특별하다고 말하는 날이 정말 나에게도 특별한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지를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는 어린이와 어른의 자리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연극 '나의 빨간날' 공식 포스터
▲연극 '나의 빨간날' 공식 포스터비영역공작단


덧붙이는 글 비영역공작단의 신작 <나의 빨간날>은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꿈밭극장에서 공연한다. 이지민이 작·연출을 맡았으며 김다영, 박수빈, 이미라가 출연하고 김상현이 목소리로 참여한다. 공연은 10월 9일 오후 5시, 10월 10일과 11일 오후 2시·5시에 열린다.
연극 비영역공작단 이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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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월간지 <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 한겨레신문 객원 필진(2016~2023)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전한다. 이밖에 문화예술 전문매체인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에 문화예술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