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 무렵> 스틸
인디스토리
철택의 형님 '광택'은 명문대 나와서 저 모양으로 산다며, 뭐라도 된 듯 세상 바꿔보겠다며 나섰던 동생을 비판한다. 그렇게 청춘 바쳤으면 뭐라도 되어야지, 챙길 거 챙긴 놈 숱한데 동생은 앞가림도 못한다며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로 자식과 손자에게 틈만 나면 들먹인다. 별것 아닌 듯해도 작금 우리 사회 내 극심한 이념 대립과 세계관 충돌을 압축한 풍경이다. 앞 세대 경험과 뒤 세대 변화를 아우르는 시선은 지금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바로 그것.
코믹한 기운에 감춰진 사회학 보고서의 향기는 점점 관객을 빨아들인다. 현숙은 우아한 싱글 라이프를 누리려 하지만, 구순 넘은 노모를 자식 중 하나가 돌봐야 한다는 형제자매들의 외압에 시달린다. 다들 돌볼 가족과 자식이 있는데 현숙만 홀로 여유롭지 않으냐는 명분이다. 기가 막히는 현숙이지만, 체면상 주변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그녀의 전원주택에서 벌어진 성대한 구순 잔치 이면엔 그런 치열한 가족 암투가 한창 벌어지는 참이다.
하지만 누구도 정작 노모 '옥남'의 의사는 묻지 않는다. 자식 된 도리와 세간의 시선에 좌우될 따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옥남의 뜻은 자식들의 통념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 주변 배경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옥남이 어쩌면 긴 삶에서 처음 얻은 자유 속에서 본인의 지난 생을 회고하는 독백은 고난의 세월을 견딘 한민족 전체의 구술사 기록처럼 관객에게 도착하기 시작한다. 설정상 옥남과 동갑인 작가 박완서의 문장을 인용해 지난 세기를 회고하는 대목이다.
개그가 깨알처럼 툭하면 터지는 기본 축과 상호 보완 관계로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성찰을 제공하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생존기는 지난 시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겪어온 고난의 시간을 압축한다. 전쟁과 기아, 독재와 그에 맞선 투쟁 속에서 우리가 겪은 희생과 혼란의 의미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어느새 풍요 속에 과거를 망각하는 세태 속 반가운 접근이면서도 복고주의와 과거 향수는 단호히 선을 긋는다. 사려 깊은 시선과 안배가 놀라운 경지다.
마치 영화에 수록된 한 편의 에세이를 듣는 체험은 가족 사이 갈등을 지켜보는 또 다른 세대, 광택의 손자가 대환장 사태를 응시하는 말 없는 시선과 상징적인 암시로 지층의 퇴적을 더 한다. 또 한 편의 탁월한 가족 풍자극이던 전작 <이장>에서도 미래 세대에 희망을 걸던 감독은 같은 맥락에서 후속 세대가 어떤 세상을 만들지 기대를 놓지 않으려 한다. 앞 세대가 돌아볼 겨를 없이 달려와 구축한 현재를 목격한 이들이 건설할 미래를 기대하는 기성세대의 믿음.
<철들 무렵>은 상영 시간을 대안적 가족관과 한국 사회 격동을 요약하는 성숙한 시선으로 가득 채운다. 이만하면 썩 훌륭한 가족 선물 세트가 아닐 수 없다. 웃고 떠들다가 문득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고, 명절에 모인 친지 사이 피하는 게 상책인 정치와 세대 이야기를 대안적으로 열게 돕는다. 참 오랜만에 온 가족과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대중 영화'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것도 추석 대목 앞두고. 선택은 관객 몫이지만 놓치면 후회하리라 장담한다.
<작품정보>
철들 무렵
Coming of Age
2025 한국 K-철가루 가족극
2026.09.16. 개봉 105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정승오
출연 기주봉, 하윤경, 양말복
제작 주마등필름, ㈜인디스토리
배급 ㈜인디스토리
30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 송원 시민평론가상
28회 정동진독립영화제 땡그랑동전상
▲<철들 무렵> 포스터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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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