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급 요양원 노인 다룬 영화, 두 번 보고 깨달은 것

[김성호의 씨네만세 1444] 202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작 <친숙한 손길>

당신의 끝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마침내 닥쳐올 죽음이란 운명 앞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를 말이다.

내가 정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 이는 생각만큼 많지가 않다. 닥쳐온 죽음 앞에서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 이도 그리 많다고는 할 수가 없다. 여든을 먹고도 몇 년이라도 더 살겠다 하는 것이 인간이다. '너는 이제 죽는다'는 선고 앞에 부정하고 맞서려 드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찰나에 불과한 오늘의 젊음과 건강이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집착하는 게 우리들이다.

그러나 때는 오고야 만다. <친숙한 손길>의 주인공 루스(캐슬린 찰팬트 분)에게도 마침내 그 시간이 닥쳐왔다. 일흔쯤은 되었을까. 영화는 평소와 다름없을 루스의 아침을 보여준다. 옷장을 열고 옷을 고르고, 주방으로 나와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그녀보다는 한참 어려보이는 사내와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꽤나 익숙해 보인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확신에 차 있어서 멋있게까지 보이는 아침시간은 루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연스레 드러낸다. 잘 꾸며진 넉넉한 부엌 여기저기에 루스가 묻어 있다. 싱싱한 재료가 손닿는 곳에 정돈돼 놓여 있고 작은 화분에선 잎을 잘라 요리 위에 뿌릴 만한 식물이 제 향을 내뿜는다. 물기도, 지저분한 것도 없이 정리된 주방 테이블에서 루스는 자신감 있는 지휘자다. 아마도 한 평생 그러했을 테다.

친숙한 손길 스틸컷
▲친숙한 손길스틸컷필름다빈

베니스의 탁월한 선택, 드디어 만나다

그녀와 함께 식사하는 이는 건축가다. 영화가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내보이는 태가 독특하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긴장은 마치 첫 날 밤을 함께 보낸 사귀기 전의 두 사람과도 엇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가만히 보자니 아닌 것도 같다.

거울 앞에서 섬세하게 단장하고 조심히 한 마디 한 마디를 골라 말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반응하는 루스의 모습에서 성적 긴장감이 드는 건 자연스럽다. 대화를 주도하며 슬쩍 선을 넘었다가 자연스레 물러나는 모습에선 소싯적 꽤나 남자들을 울렸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가 못하다. 시종 경직돼 있는 그는 루스의 질문에 응답할 뿐 다른 무엇을 하지 못한다. 그는 건축가이고 아내가 있다. 그는 둘이 아침식사를 마친 뒤 꽤 중요한 일정이 있단 걸 암시하는데, 루스에겐 데이트처럼 여겨지는 그 일정이 남자가 시종 무거운 기색을 띤 지켰던 이유가 된다.

<친숙한 손길>은 검증된 영화다. 2024년 있었던 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섹션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그리고 미래의 사자상을 받았다. 오리종티 섹션은 칸영화제로 치자면 '주목할 만한 시선' 쯤이 될까. 아직 거장이라 불리지는 않으나, 거장의 반열에 오를 법한 가능성 충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경쟁하는 장이다.

<친숙한 손길>은 루마니아의 젊은 감독 보그단 무레사누의 < Anul nou care n-a fost >와 함께 이해 오리종티의 주인공이 됐다. 베니스가 꼽는 최고의 신예에게 주어지는 미래의 사자상 또한 사라 프리들랜드가 차지했다.

친숙한 손길 스틸컷
▲친숙한 손길스틸컷필름다빈

최고급 요양원조차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불행히도 한국에선 이와 같은 영화를 만날 기회가 드물다. 톱스타가 출연하거나, 아니면 이미 세계적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의 영화만이 수입돼 극장에 배급되기 때문이다. 소위 잘 팔리는 '공포'나 '스릴러', '액션' 등 장르성 강한 영화라면 그래도 틈새시장을 노려볼 텐데, 정통 드라마거나 다큐멘터리, 아니면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독자적 작품세계를 쌓아올린 진지한 작품, 실험성 짙은 영화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친숙한 손길>이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니스에서 드문 성취를 거두고도 2년이나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필름다빈과 같이 한국 영화계의 다양성을 고심하는 영화사가 있어 뒤늦게나마 기회를 얻었음을 나는 몹시 다행하게 여긴다.

<친숙한 손길>은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다. 앞의 남녀가 집을 나서 향한 곳은 미국 어느 요양원이다. 그것도 꽤나 고급 시설로, 상주 의사는 물론, 노인들을 상대하는 전문적인 인력까지 충분히 포진해 사려 깊은 보호와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깔끔한 개인실부터, 수영장까지 딸려 있는 시설과 이런저런 체계적 프로그램이 있는 요양원은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닐 테다. 루스가, 그러니까 정신이 온전할 때의 루스가 발품 팔아 비교해가며 고른 시설이라고, 그 아들인 건축가 사내가 말한다.

그렇다. 루스는 기억장애,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다시 돌아보자니 오프닝부터가 그를 암시했던 듯하다. 옷장을 열고 이런저런 옷을 고르다가 잠시 멈춘 뒤 아무것도 꺼내지 않던 장면이, 요리 도중 토스트기에서 튀어 오른 빵 한 조각을 뜬금없이 설거지 된 그릇을 놓는 선반 위에 올려둔 것 등이 그러하다.

아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그와 데이트 하는 듯 대화하던 순간의 불협화음도 그래서였을 테다. 그러니까 이쪽의 로맨스는 저쪽의 무겁고 진지한 드라마다. 그 협응하지 못하는 상황은 일종의 공포로써 발현된다.

친숙한 손길 스틸컷
▲친숙한 손길스틸컷필름다빈

돌출하는 장면, 떠오르는 질문

<친숙한 손길>은 루스가 요양원에서 겪는 일상을 뒤따른다. 간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듯한 담당 직원 바네사(캐롤린 미쉘 스미스 분)의 돌봄을 받고, 식사를 하고, 요양원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따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요양원의 노인들은 대개 루스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해 보인다.

루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어쩌다 말을 들은 이도 어느 순간 '우리가 왜 대화하고 있는 거죠?' 하고 되묻기 일쑤다. 한 눈에 보기에도 깔끔하고 세련된 루스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잠시 전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노인들과 달리 루스는 제가 처한 상황을 얼마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루스가 요양원 조리실에 들어가 샐러드를 만드는 장면이 있다. 매번 식당에서 주는 식사가 영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루스는 다짜고짜 조리실에 들어가 주방장에게 인사를 건넨다. 새로 온 듯 보이는 주방장에게 전임자 맥스는 어디에 갔냐며, 자기가 팬트리 담당 조리사라고 말한다. 그 당당함에 주방장과 다른 조리사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럼 샐러드를 맡아달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는 몰래 바네사를 호출한다.

루스가 음식을 준비하는 솜씨가 남다르다. 치매 걸린 노인의 망동이 아니라, 숙련된 조리사의 손길이 깃든 접시들이 뚝딱뚝딱 나온다. 바네사도, 그녀를 찾아 주방으로 온 의사도 아무런 말없이 루스가 내민 음식들을 받아먹는다. 이들에게 관리 받던 지난 며칠 동안의 루스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생기, 환자나 노인이 아닌 루스란 인간이 영화 위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영화 가운데 돌출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의사에게 진찰받던 루스가 갑자기 '보르시'란 요리를 만드는 법을 줄줄 읊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다른 노인들처럼 문제 있는 늙은이라면 이런 요리 조리법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따지듯 묻는 루스의 모습이 절박하다.

루스는 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 방금 옷장을 연 이유를 찾지 못하는 여자, 다 구워진 토스트를 설거지 거리를 놓는 선반 위에 올려두는 조리사다. 그러나 여전히 루스는 루스이고, 엄마이자 여자이며 조리사다.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건 공포다.

친숙한 손길 포스터
▲친숙한 손길포스터필름다빈

늙고 병들고 죽어갈 모든 이에게

베니스의 선택이 탁월하다. 루스를 연기한 캐슬린 찰팬트의 섬세한 표현은 그녀의 상태와 처한 상황, 심지어는 살아온 삶과 살아갈 나날까지를 관객에게 무리 없이 알게 한다. 감독 사라 프리들랜드의 연출 또한 자못 인상적이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는데, 수시로 마주한 공포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또 내가 놓쳤을 게 분명한 감독의 연출들을 좀 더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특히 두 번째 보았을 때 나는 감독이 이 영화를 고의적으로 공포영화처럼 연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물이 흔히 활용하는 불협치, 소리와 상황과 시선과 감정 따위가 서로 맞지 않아 생기는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증폭하고 배치하며 활용한단 걸 확인했다.

이를테면 영화 속 루스가 요양원 수영장에 가만히 떠 있는 장면에서 바네사가 다가와 수영시간이 끝났으므로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루스가 떠 있는 그 평화롭고 적막한 순간 가운데 마치 놀이공원에서나 들려올 법한 소리들이 침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가온 바네사가 말을 건다. 이때 불쑥 다가온 바네사를, 영화는 누워 있는 루스의 시선에서 포착한다.

관객은 바네사가 뒤집힌 채 저기 프레임 위에서 머리를 내미는 모습을 본다. 요양원에서 루스에게 가장 친근한 존재일 바네사의 등장이 어딘지 낯설고 무서운 감정을 일으키는 건 왜일까. 평화로운 루스의 삶 가운데 닥쳐온 건강의 변화도 바네사처럼 불쑥 찾아와서는 아닐까.

앞의 조리실 장면에서도 영화는 바네사의 얼굴을 통상적으로 영화가 잡지 않는 방식으로 큼지막하고 균형조차 맞지 않게 포착한다. 아마추어 작가도 잡지 않는 프레임 구성은 그러나 다분히 의도된 것일 테다. 불현듯, 또 수시로 깨어지는 안정적 구도가 영화 속 루스의 상태와 묘하게 대응한다.

깔끔하고 야무지게 살아왔을 루스가 제 삶의 가장 중심된 것부터 무너져가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구도, 배경, 소리, 장르까지, 도무지 조응하지 않는 것들이 맞물리는 불편함은 공포물에서와 같이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대신 보는 이가 영화 속 인물이며 상황에 거리를 두고서 그 꺼림칙함을 느끼도록 한다.

몰입하여 빠져들게 하고, 영화와 관객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히려 드는 영화는 흔하다. 그러나 멈추어 생각하게 하고, 거리를 벌려 충실히 바라보도록 하는 작품은 드물다. <친숙한 손길>은 전혀 친숙하지 않은 연출법으로써 관객이 마땅히 돌아봐야 하지만 외면하고 밀쳐두었을 과제를 불쑥 들이민다.

그로부터 관객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루스가 되었을 때, 바로 그 순간 마주하게 될 불편과 괴로움, 공포에 대하여 살피게 된다. 마침내 닥쳐올 쇠약과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마침내 우리를 덮어올 운명의 친숙한 손길에 우리가 겁먹고 몸서리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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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