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여행 영화를 상상하게 하는 제목인 <경주기행>은 실은 조금 살벌한 복수극이다. 조금 살벌하다고 한 이유는 영화 중간중간 틈입하는 코미디의 효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자들의 복수가 대단히 대담하거나 치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을 적극적이고 전략적으로 사용해 완력 있는 살인자를 제압해 처치해야 하는 응징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여성 가족 구성원들이 누군가를 해치는데 조련되지 못한 몸을 가진 난맥상을 안은 채 복수를 감행하면서 시작된다.
한번 가정해 보자. 미성년의 여자 가족이 악당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의 가족처럼 가족 프로젝트로 복수에 나설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적 복수를 다룬 콘텐츠가 많이 양산되고 있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셀프 복수에 선뜻 나설 수 없는 피해자나 유가족들이 대부분이라는 반증이다.
여정은 시작부터 삐걱댄다. 'family'라 새겨진 똑같은 티셔츠를 나누어 입었지만 이 가족은 유니폼만큼 단합하지 못하고 있다. 통상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있은 후 피해 가족이 똘똘 뭉쳐 불행을 타개해 나갈 거라 생각하지만 정반대다. 오히려 큰 불행을 겪은 가족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혼란과 균열을 겪는다. 가족 누군가의 탓으로 사건 사고가 났다고 고통을 전가하거나, 사건 사고의 아픔을 두부 자르듯이 균일하게 분할해 짊어질 수 없는 불균형이 불화를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영화 속 한 가정의 막내와 아버지의 죽음 후 남겨진 엄마와 세 딸들 역시 똑같은 고통이나 애도의 방식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런 다름이 살인자에 대한 복수극을 처음부터 삐걱대게 만든 이유다. 그리고 이 삐걱댐은 남겨진 가족 각각이 사건 후 피해를 어떻게 바라봤고 어떻게 헤쳐나가고 싶었는가 그 차이를 드러낸다. 피해는 균질하지 않았다.
세 딸들의 바람과 엄마의 욕망
사건 전후 줄곧 집안을 돌봐온 장녀(공효진)는 복수로 고통에 갇히기보다 결혼으로 생긴 자신의 가족과 행복해지고 싶다. 사건으로 고시를 포기한 둘째(박소담)는 투자로 새 삶을 살아보고 싶지만 어디 쉽겠는가. 운동하는 셋째(이연)는 딸들 중 가장 사랑받지 못했다는 애초의 박탈감과 죽은 동생의 죽음을 자신이 자초했다는 죄책감으로 복수보다는 회피로의 도피를 원한다. 이러고 보면 복수를 진정 원한 이는 가족 중 엄마 옥실(이정은)뿐이었던 셈이다.
옥실은 '속에 불덩이를 지니고' 있기에 그 불을 꺼야만 삶을 도모할 수 있다. 그래야 다시 남겨진 딸들의 엄마로도 손녀의 할머니로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소동은 망자에 대한 천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고통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은 깨진 영혼들의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각난 영혼을 수습해 회복하고 다시 살고자 하는 욕망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새 삶을 위해 마침표를 찍기 위한 여정이었던 복수극은 뜻하지 않은 변수로 계속 위기에 처한다. 복수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가족 전원의 상처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고 이때 옥실은 어떤 결심에 이른다. 살인마를 처형하려다 오히려 위협을 당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다. 이를 완수해야만 죽은 딸을 꿈에서라고 떳떳이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 엄마의 응징은 딸을 위한 것에서 딸을 잃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의례가 된다.
영화 말미에 온갖 부상에도 불구하고 당산나무처럼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 봉우리 끝까지 살인자를 끌고 가는 옥실은 처절하게 고행하는 구도자처럼 보인다. 이후 그녀가 직접 살인자에게 마땅한 죄를 고지하는 의례는 부정의한 사법시스템 대신 딸을 잃은 엄마가 펼치는 정당한 재판이다. 죄인을 징치하며, '복수를 그만두고 싶을까 봐, 살인자를 용서할까 봐' 두려웠다는 엄마의 고백은, 여타 복수 콘텐츠가 보여주는 피해자의 흔들림 없는 복수심이나 증오심이 주는 대리 만족성 쾌감이 아니라, 복수의 과정 자체가 번번이 흔들리며 싸우는 지난한 인간의 윤리적 갈등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엄마의 응징을 끝까지 밀어 부쳐 '복수는 나의 것'을 완성시킨다. 보통의 여성 복수자가 택할 것이라 믿어지는 강렬한 복수심과 징벌의 카타르시스 그러나 끝내 용서하고 만다는 허무한 방식을 깨부순다. 엄마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끝까지 갔다. 그리고 살인자를 자신만의 단두대에 올렸다. 그녀의 복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당하게 완수한 듯 보인다. 하여 영화가 여기서 끝났으면 어땠을까. 이후 에필로그처럼 보이는 모성의 회복은 어딘지 개운하지 않다. 용서 없는 치열한 복수는 모성을 배반한다고 여긴 걸까.
결말의 찜찜함을 남겨두고도 이 영화는 큰 미덕을 보여주었다. 조미조 감독은 극 전반을 주연은 말할 것도 없고 조연마저 여성 배우들로 꽉 채워 끌고 갔다. 특히 조연들이 빛났다. 이런저런 단역에서도 신스틸러로 등장하는 남권아 배우의 능청스런 캐릭터도 좋았고, 흔히 살인의 뒤를 추적하는 형사로 상투적으로 분하는 남성 배우 대신 중년 여성 형사로 분한 김정영 배우의 캐스팅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옥실의 동네 이웃으로 잠깐 등장한 강애심 배우 등 모두 빈틈없이 제 캐릭터를 완수해냈다. 감독의 놀라운 선택과 역량이었다고 본다.
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 의아하다고 여긴 점은 이 영화에 희극적 요소가 꼭 필요했는지다. 빽빽한 긴장감으로 영화를 끌고 가 스릴러로 장르를 완성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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