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혜자, 표류기> 스틸
㈜마노엔터테인먼트
몇 차례의 변곡점을 거치며 혜자와 희숙, 뒤늦게 합류한 고향 친구 '현선'의 '표류'가 마무리된다. 물론 뜻밖의 행운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야기를 따르다 보면 해피엔딩의 희망은 눈 녹듯 관객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겉으론 여전히 남루한 일상만 그녀들 앞에 내일도 모레도 펼쳐질 게 뻔하다.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만 한다. 혜자는 다시 상경하고 희숙은 구차한 나날을 거듭하며, 현선 역시 물려받은 횟집에 묶여 변함없는 나날을 이어갈 테다.
하지만 실체는 좀 다르다. 아무것도 겉으론 변하지 않아도, 함께 표류하며 동고동락한 이들의 삶은 작게나마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게 '로드무비'가 존재하는 이유다.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달리 밀폐된 자가용이 아니라 두 발과 대중교통에 의지해 길바닥을 헤매는 여정은 반드시 특별한 뭔가를 남긴다. 지갑에 돈은 없어도 서울에선 차갑게 식어버린 소소한 인정을 목격하고, 초라한 밥상이나마 기꺼이 밥 한 공기 내어주는 소박한 우애가 '고향'의 향수를 풍긴다.
혜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비호감 캐릭터에 머문다. 그녀는 30년 인생을 유리천장 깨기에 바치듯 살았다.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듯 주인공은 끝없이 부딪히고 소리치며 불합리와 싸운다. 하지만 뾰족한 성과는 없고 주변에서 기대한 호응도 얻지 못한다. 욕을 입에 달고 사니 주변에서 오히려 사고뭉치 민폐 캐릭터 취급받을 뿐이다. 하지만 대척점에 선 직장 동료 '정희'라고 사다리를 올라 '신데렐라'가 되진 못한다. 둘의 생존법 비교가 관전 지점이다.
<97 혜자, 표류기>는 드러나는 결과로만 따진다면, 최서해의 '탈출기' 21세기판에 가깝다. 물론 절대적 기준에서 상대적으로 빈곤과 불합리가 이행되긴 했다. 일제의 강점과 무단통치에서 이제는 자본주의 차별과 그에 빌붙은 온갖 차별이 새로운 '계급'을 형성한 상태에서 그 밑바닥에 처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관객 각자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 한국 영화 주류가 단지 풍경으로만 소비하던 지방의 속살을 통해 체감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다.
'지역 영화' 또는 '로컬 영화' 붐이 찻잔 속 태풍처럼 불어온 적이 있다. 매끈한 상업영화 복제에 질린 평단과 관객이 한때 호평했지만, 이 역시 자기복제에 그치며 한국 독립영화가 소모한 주제, 극단적 현실의 상투적 나열의 또 다른 버전 아니냐는 잔인한 평가는 일부 진실이다. 동시에 여전히 건질 구석이 있다는 걸 이 작품은 간절히 호소한다.
영화는 작지만 확실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하려 애쓴다. 세상이 확 뒤집힐 순 없어도 개인의 의지는 가능하단 믿음, 혜자의 영화 속 변화가 현실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작품정보>
97 혜자, 표류기
Drifting
2025 한국 하이퍼리얼리티 생존 브이로그
2026.09.09. 개봉 122분 15세 관람가
감독 정기혁
출연 정은지, 김주안, 이혜, 김강희 외
제작 후앤유아츠㈜ 102CINEMA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97 혜자, 표류기> 포스터㈜마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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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