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하고 딱 1분쯤 지났을 때다. 영화의 오프닝, 베트남 해상에 뜬 작은 화물선 선실 기둥에 잔뜩 멋을 부린 흰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묶여 있는 장면이었다. 꽤 많이 맞았고, 또 오래 방치된 모양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아래엔 그의 것으로 보이는 오물이 널려 있다. 이때 선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으니 한눈에 보아도 '나 아주 불량하오'라고 써 붙인 패거리다. 이제는 전국적 인지도를 가졌다 해도 좋을 윤경호와 스윙스가 연기한 이들이 두목과 부두목 격이다. 묶여 있는 흰 양복 사내는 변요한이 연기했다. 그러니까 그가 적어도 이곳에서 죽을 일은 없단 걸 보는 모두가 알고 있다.
1분쯤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게 이 영화의 방향을 정한 결정적 장면이 있다. 묶여 있는 주인공 장태영(변요한 분)에게 스윙스가 연기한 사내가 다가가 발길질하는 순간이다. 잔뜩 강조되는 문신과 험악한 인상에도 별반 날렵해 보이지 않는 그 발길질이 태영에게 닿는 순간, 스피커에선 마치 채찍으로 고막 주변을 치는 듯한 파괴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통상의 액션영화에서 들리는 타격음보다도 한층 강조된 이 소리는 수없이 치고받아 본 이라면 누구나 단박에 결코 신체를 타격해선 얻을 수 없단 걸 알아챌 수 있는 형태다.
순간 다시 보게 된다. 선실 아래 흩뿌려진 분비물은 그것이 도무지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없다. 황당할 만큼 넓고 고르게 뿌려진 분비물에 비한다면 피 칠갑을 한 태영의 차림새가 오히려 잘 꾸며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분비물의 고루 펴지기까지의 물리적 동선을 떠올려보면 이 또한 비현실적이다. 이로부터 하나하나 다시 보게 되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한국 법제상 불가능한 사업적 성공과 서른이 훌쩍 넘어 보이는 이들이 교복을 입고 펼치는 연기라거나 액션신에서 삽입되는 당혹스러운 동선과 음향, 심지어는 핵심이 되는 포커게임에서의 사실성이 배제된 연출까지 하나하나 모조리 눈에 띈다. 가만히 뜯어보면 배우들조차도 실제 있을 법한 인물 그대로가 아닌 마치 만화나 영화 속 배역을 연기하는 게 목표인 듯 과장되게 캐릭터 연기를 펼친다. <타짜> 시리즈 네 번째 영화, <타짜: 벨제붑의 노래> 이야기다.
▲타짜: 벨제붑의 노래스틸컷
CJ ENM
20년 세월이 흘러 묻는 오늘의 자리
최동훈의 <타짜>가 나온 지 꼭 20년이 되었다. 시간의 세례 앞에 한때의 흥행작이 전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수두룩하다지만 이 영화의 명성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아니, 도리어 더욱 전설적인 작품으로 추앙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개봉 당시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장면이 온라인상에선 밈처럼 회자되고, 화투패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듯한 연출은 한국형 오락영화의 새 기준을 세웠다고까지 평가받는다.
출연한 배우 하나하나가 각자의 필모그래피에서 기록할 지점을 써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조승우와 백윤식, 김혜수, 유해진, 김상호, 김윤석, 주진모, 김응수, 조상건 등 이 영화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 배우가 한둘이 아니다. 이 영화가 그저 원작 만화의 안정적 재현, 또는 당대 상업영화의 평균적 수준을 목표로 했다면 이룰 수 없었을 성취다.
<타짜> 시리즈가 더는 전의 영광을 찾을 수 없으리란 우려가 컸다. 8년 만의 속편 <타짜-신의 손>을 이끈 강형철, <타짜: 원 아이드 잭>으로 무너진 시리즈의 부흥을 떠맡은 권오광이 모두 연출자로서 최동훈과는 현격한 격차를 가져서다. 확고한 인상을 새긴 첫 편이 있다는 건 후속편을 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 되는 것이었을까. 인제 와 돌아보면 도리어 족쇄이자 장애물에 가까운 듯도 하다.
<타짜: 벨제붑의 노래>를 연출한 건 최국희다. 앞의 강형철이 <과속스캔들>과 <써니>의 감독으로 전혀 다른 장르에서 검증된 감독이란 것, 권오광은 최동훈이나 강형철에 비해 이름값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에 비추어 최국희는 그나마 앞선 선택보다는 나은 수처럼 보인다. 2016년 작 <스플릿>이 도박볼링을 다뤄 장르적으로는 <타짜> 시리즈와 가까운 편이고, 이후 감독한 <국가부도의 날>과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장르를 옮겨가며 최소한의 연출력을 검증받았다고 볼 수 있어서다. 한국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중견 감독 가운데 도약의 가능성을 기대할 정도는 된다는 뜻이겠다.
그가 이 영화를 연출한 방향은 무척 명확해 보인다. 단 1분 만에 느낀 이색적 감상이 영화가 끝나기까지 유지된다 해도 좋겠다.
▲타짜: 벨제붑의 노래스틸컷
CJ ENM
'타짜' 되지 못한 '벨제붑', 속임수 걸리면 뭐다?
주인공인 장태영은 오랜 친구인 박태영(노재원 분)과 함께 메타버스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카지노로 큰 성공을 거둔다. 회사를 주식회사로 상장시켜 한국을 대표하는 청년 사업가로까지 주목받는다. 물론 온라인 기반 카지노로 거부가 된 사례가 해외엔 존재한다. 그러나 접근하기 좋지 않은 메타버스 기반은 아닐뿐더러, 온라인이라 할지라도 도박 및 카지노 관련 법령이 엄격하게 짜인 한국에서 이 같은 사업체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좋다.
만약 해외로 나가 성공했다면 본사를 한국에 두고 심지어 상장하며 금감원 감독을 받는 업체의 투자까지 받는 영화적 설정과는 완전히 괴리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배경은 물론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심지어는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확보할 생각이 없다. 이 영화가 크고 작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러닝타임 내내 그러하듯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화재며 살인사건부터, 소방 및 경찰의 화재 및 실종사건 처리방식이 정말이지 최소한으로도 고증돼 있지 않다. 덕분에 영화는 현실에선 좀처럼 이뤄질 수 없는 일들이 무척 쉽게 달성된다. 살인도, 배움도, 출세도, 돈벌이도 모두가 너무나 쉽다. 영화는 그저 마구 내달린다. 대학입시부터 사업체 성공, 투자 유치, 야쿠자와의 연계, 국회에의 불법로비 등으로 가지를 뻗쳐 나간다. 규모가 커질수록 구멍의 크기 또한 커진다는 것을 전혀 저와 상관이 없는 문제인 양 대한다.
일례로 박태영이 제 사업의 명줄을 쥔 국회의원에게 수 십억 원을 뒷돈으로 준 뒤의 에피소드에서, 그는 그 의원의 생김이며 특징조차 황당할 만큼 모르고 있다. 그 쪼잔하고 집요한 캐릭터를 생각하면, 의원의 정보가 어디에나 공개돼 있단 걸 떠올리면 더욱 당혹스러운 지경이다. 수십억 원을 우습게 움직이는, 아마도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야쿠자 조직의 반역 또한 너무나 쉽게 이뤄진다. 영화의 결정적 순간이 되는 국경을 넘는 물밑 동맹 또한 아무 어려울 게 없다는 듯 쉽사리 진행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핍진성이나 개연성, 그러니까 실제 세상에서 가능한 일인지는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사실은 중요치 않고 어떻게든 관객이 믿기만 하면 된다는 이 영화의 방식은 놀랍게도 이 시대 영화연출의 주요한 경향이기도 하다.
▲타짜: 벨제붑의 노래스틸컷
CJ ENM
방망이 깎던 노인은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극영화가 얼마나 사실을 재현하는 데 공을 들였던가. 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 등의 사조가 일어났고 졌고,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거나 카메라의 움직임을 절제하는 등의 시도 또한 이어졌다. 그저 연출만이 아니다. 극중 인물의 자아를 뒤집어쓰는, 그리하여 살인마를 연기하는 이는 그저 흉내가 아닌 얼마쯤은 살인자의 인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까지 나아가려 하는 메소드 연기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여러 액션배우가 적어도 스턴트만큼은 제가 직접 해야 한다며 위험을 무릅썼다. 대역을 쓸 때도 적어도 치고 맞고 구르고 뛰는 동선만큼은 실제 액션을 재현하는 것에 가깝게 공을 들였다. 요컨대 극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거짓일 뿐이지만, 실제보다 더 진실하게 관객을 설득하려 들었다. 그것이 지난 시대 결코 비주류라 할 수 없는 극영화의 사조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은 개념은 뿌리째 흔들린다. 이쪽에서 쳐서 저쪽으로 나가떨어져야 하지만 이쪽에서 치고 대충 이쪽으로 구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카메라가 흔들고 자리를 옮기며 적당히 그럴듯하게 보이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다. 심지어 CG와 AI를 통한 보정까지 보편화되며 아예 촬영을 배경과 전혀 다른 곳에서 한다거나 만나지 않고도 만난 것처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실제 있는 것보다 자연스러워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를 연기하는 게 연기에 능숙하지 않은 장애인이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인식 또한 흔하다. 진실의 재현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그 흐름이 가속화되는 동안 핍진성이며 개연성, 그러니까 가능한 것조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관객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관객을 속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판가름이 나는 거라고 말하는 창작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사실의 장벽에 가로막히는 수많은 순간과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고투하는 과정에서 태어나던 훌륭함을 요즈음 영화 가운데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의 편의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에둘러 돌아가면 된다고 믿는 이들이 흔해져서다. '뭐가 중한가', '어차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윽박지르며 질주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중하다'고, '영화는 영화 이상의 것'이라고 고집하던 이들을 떠올린다. 방망이 깎던 노인은 이미 죽어 없어지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한번을 더 외치던 장인 또한 사라진 오늘이다. 나는 영화 스스로 영화가 쌓아 올린 탑을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타짜: 벨제붑의 노래포스터CJ ENM
비운 자리도 채우지 않고서
<타짜: 벨제붑의 노래>엔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그저 개연성과 핍진성만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연기와 동선만을 문제 삼는 것 또한 아니다. 창작자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돌보지 않은 흔적이 캐릭터의 배치에서부터 드러난다. <타짜>엔 평경장과 짝귀, 고광렬, 정마담에 너구리까지가 자리했다.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며 테이블 저편에 앉아 있기만 해도 독자적인 중력을 발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떠한가. 일본 야쿠자 두목 사사키(이하라 츠요시 분)와 그 곁에 선 매력적인 여성 가네코(미요시 아야카 분), 다시 그를 지키는 또 다른 야쿠자 부하들, 스리슬쩍 손장난 하는 백인 딜러와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오 회장(홍다오 분)의 전사가 궁금한가. 그 납작한 캐릭터들에게 영화가 보여준 이상의 이야기, 삶과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영화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버려두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있었을 게 분명한 배우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작품 또한 납작해지고 말았다.
<타짜>가 막을 내리고 그 속편이 기대는 건 무엇인가. <타짜: 벨제붑의 노래>는 전대 캐릭터들이 비운 자리를 도모하려는 야욕조차 없다. 단 1분 만에 거짓으로 얼마든지 진실을 대체할 수 있겠다는 어리석은 자신감만 들킬 뿐이다. 그러나 이는 근래 가속화되는 세계, 특히 한국에서 더욱 더 두드러지고 있는 영화 창작의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일 뿐이다. 이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영화가 잘못됐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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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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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단 1분 만에 드러난 '타짜'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