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네 번째 재개봉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호소다 마모루의 대표작으로, 개봉 20주년을 맞아 이뤄진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에 발맞춰 16일 재개봉이 확정됐다.
20년 전 애니메이션은 디지털본이라 할지라도 극장 상영용 마스터소스가 현재보다 현저히 낮은 해상도로 출력돼 있게 마련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상영 당시 마스터소스를 가능한 높은 해상도로 다시 랜더링해 출력하는 작업이다. 쉽게 말해 현 시점에서 가능한 기술력을 동원해 원본을 보정하고 복원한다는 뜻이겠다. 2026년 현 시점에선 4K 해상도 재출력이 가능한데, 훨씬 선명해진 색감부터 작가의 의도에 더 부합하는 명암까지를 표현할 수가 있어 작화에 손대지 않고서도 더 나은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을 안기기도 한다. 이 덕분에 올해만 해도 벌써 10여 편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한국에 재개봉하기도 했다.
특히 애니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색감이 크게 선명해진다는 점에서 시각적 쾌감을 더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같이 여름의 청량감이 돋보이는 작품에선 그 효과가 배가된다. 푸른 하늘, 새하얀 교복, 저무는 석양이 빚어내는 특별한 감각적 조화가 훨씬 산뜻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번 재개봉에 유달리 많은 애니팬의 관심이 모이는 이유가 되겠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스틸컷
와이드릴리즈
시간을 돌려 돌아온 20년 전 그 애니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한국에서 큰 호응을 받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호소다 마모루는 이 작품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일본 애니 감독으로 꼽힐 만큼 주목받았다. 그 차기작 <썸머 워즈> <늑대아이> <괴물의 아이> <미래의 미라이> <용과 주근깨 공주> 등이 모두 한국서 정식 수입돼 개봉할 수 있었던 데도 이 작품의 성공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첫 개봉 당시 채 10개가 되지 않는 적은 상영관만 확보했음에도 총 관객수 5만 명을 넘기는 놀라운 흥행을 이룬 것도, 이후로도 일본에서보다 훨씬 꾸준히 재개봉이 이뤄진 것도 이 영화가 한국에 깊이 통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도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한국인의 마음에 그리도 깊이 박혔을까. 이야기는 일본의 고등학교 2학년생 마코토를 주인공으로 한다. 짧은 커트머리를 한 소녀로, 단짝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의 대부분인 말광량이 소녀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리 같은 반 사내녀석인 치아키, 코스케와 늘 함께 지내는데, 셋이서 야구를 하고 노래방에 다니는 것이 꼭 또래 사내아이 무리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마코토의 일상에 난 데 없이 떨어진 변화를 그린다. 우연한 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시간여행자를 중심으로, 그가 가는 곳을 유일한 세계처럼 그린다는 점에서 시간여행물이 흔히 복잡하는 복잡한 평행세계 문제로부터 해방된 단순한 세계관을 가졌다. 즉 마코토가 가는 곳이 곧 마코토가 사는 세상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스틸컷
와이드릴리즈
평범한 소녀가 시간여행을 하게 되면
처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하다. 철 없는 소녀의 일상이란 수수하기 짝이 없다. 그 귀한 시간여행 능력을 가지고서 먹지 못한 푸딩을 먹는다거나 좋아 하는 메뉴가 나왔던 며칠 전 저녁식사 자리로 돌아가는 등의 일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린다. 물론 이따금은 실수나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도 시간여행을 하는데, 이 작은 선택이 예기치 못한 사건을 불러오는 인과의 문제 또한 없지 않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기본적으로 성장서사다. 티 없이 맑은 소녀 마코토가 전에 없던 커다란 힘, 또 그것이 가져온 변화와 마주하여 전과는 다른 존재로 자라나는 이야기다. 성장이란 어떻게 이뤄질까. 성장이 그저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몸이 커지면 마음과 정신 또한 자연히 자라는 것이라면 세상에 이와 같은 성장드라마는 존재할 필요도 없을 테다.
때로 성장이란 동물의 탈바꿈과 마찬가지로 몰라보게 닥쳐온다. 어떤 경험은 감각을 깨우고, 어떤 배움은 지성을 일으키며, 어떤 사고는 이성을 전과 다르도록 한다. 정서적 고양과 사상의 월장이 이뤄지는 광경을 나는 살며 몇 차례쯤 목격했다. 그와 같은 광경은 가히 기적적이다. 송충이가 나방이 되고, 굼벵이가 장수풍뎅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와 같은 변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겐 더 큰 송충이며 굼벵이가 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질 뿐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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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드라마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식
도덕과 정서, 사상과 인식의 성장을 송충이며 굼벵이의 탈바꿈에 비하는 것은 이것이 도약이며 월장과 가까운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깥에서 그와 같은 성취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겐 이례적이고 특별한 기적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성장서사가 감동적이면서도 매혹적인 것은 바로 이 흔하고 당연하지 않단 감각에서 비롯된다.
마코토의 성장은 바로 이 당연하지 않음에서 시작된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성장이기에 평범하지 않은 자극을 주는 건 성장드라마의 흔한 습성이라 해도 좋겠다. 모두에게 흔히 찾아오는 자극이라면 그 성장 또한 모두에게 흔하게 발견될 것이므로. 이 영화가 마코토에게 주는 성장의 비약은 시간여행이란 능력이 가져온 지극히 이례적인 문제다.
시간여행 영화의 핵심은 언제나 같았다. 선택,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어떤 평행세계를 선택하느냐, 바꿀 것이냐 말 것이냐, 돌아갈 것이냐 안주할 것이냐, 말할 것이냐 비밀로 할 것이냐, 그 모든 선택이 영화의 주된 갈등이자 결정적 차이를 빚는 요소로 기능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해 큰 것으로, 가벼운 선택으로부터 무거운 것으로, 작은 저항에서 커다란 저항으로 나아간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선택의 무게 앞에서 철없는 소녀였던 마코토는 더는 그와 같이 어리기만 한 아이가 아니게 된다. 요컨대 시간을 달리면 소녀는 숙녀로 자란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포스터와이드릴리즈
그 여름, 소녀에게 다가온 사랑
영화가 마주하는 가장 무거운 선택은 결국 삶, 그리고 관계와 통하는 것이다. 시간을 달릴 수 있는 능력은 한도가 있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아챈 마코토에게 남은 기회는 오로지 단 1번뿐이다.
현대 철학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오래도록 논하였다. 사랑과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의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정의와 예술뿐이었다. 세상 수많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이 같은 단어의 남용 가운데서 나와 네가 염두한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른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남녀의 열렬함이고, 다른 누구에겐 그를 넘어선 베풂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사랑인 것이 다른 누구에겐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말이 사람마다 전혀 달리 쓰이는 가운데, 그 모든 쓰임을 포괄할 수 있는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를 놓고 사고할 줄 아는 이들이 오래 고민한 때가 있었다.
오랜 숙고 끝에 나는 사랑이란 나 자신을 넘어서 다른 이를 우선하는 마음이라 결론내렸다. 개체로 태어난 인간이 자기를 넘어 타인을, 다른 존재를 앞세우는 것이 사랑의 진짜 뜻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야만 세상에서 사랑이라 말하는 많은 경우를 포괄하면서도 사랑 곁에 붙은 사랑 아닌 것을 덜어낼 수 있었다.
마코토 앞에 놓인 문제가 꼭 이와 같아서 이 아이는 제 인생에 처음 찾아온 문제를 사랑으로 키워나간다. 영화는 마코토와 그녀 곁에 선 또 다른 이를 통하여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삶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그와 관련이 있는지를 묻는다. 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진실로 많은 이들에게 통한 이유가 바로 이 물음의 진정성에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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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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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되감아 돌아온 애니메이션, 한국이 특히 사랑하는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