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기억, 재현을 넘어 함께 우는 마당이 되다

제20회 4·3평화인권마당극제, 제주·대전·일본 공연단체가 함께 역사적 상처를 의례화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포스터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포스터조훈성

제20회 4·3평화인권마당극제는 제주 4·3의 역사적 의미를 불러내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한데 묶는 공연예술제다. 2007년부터 올해로 스무 번째 마당극제가 끊임없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주최·주관 단체인 놀이패 한라산(아래 한라산)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번 마당극제는 지난 9월 4일부터 6일까지 제주문예회관 야외공연장과 소극장, 그리고 4·3 유적지인 도령마루에서 펼쳐졌다.

특히 이번 축제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4·3의 비극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역사적 상처를 정서화한 작품들을 마당극제에 선보였다는 점이다. 비극적 상실의 이야기를 의례화하고, 관객과 함께 애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개막굿으로 펼쳐진 산오락회와 한라산의 별리, 일본 공연단체 Team KulKri의 까치의 잘라진 하늘, 그리고 4·3 유적지인 도령마루에서 아이고프로젝트와 참여 예술인들이 함께한 군벵놀이 추모굿 퍼포먼스는 제주 4·3의 기억을 잇고 있었다.

덧붙여 지정남 커뮤니케이션의 내복, 대전 창작집단 쟁이의 달정이와 버들이 등은 마당극의 동시대적 가능성을 보여줬다. 각 지역의 역사적 비극 속에서 잊힌 이들을 되살리고, 애도의 의지를 감각하게 하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떠난 이와 남은 이을 위한 굿

개막공연 '별리'는 이번 마당극제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별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떠나보냄과 남겨짐,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의 거리, 물리적·강제적 이별의 거리를 마주 보고 헤아려보는 마당굿이었다.

4·3을 다룬 한라산의 주요 공연에 쓰이는 노래들을 불러내면서도 비극적 사건을 선명하게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수많은 참혹한 죽음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극적 서사와 굿의 정서, 놀이적 마당의 호흡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면서 이 굿은 죽은 이를 위한 의례에만 머물지 않는다. 망자를 부르고, 산 자의 슬픔을 드러내며, 한 지역 공동체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함께 나누는 마당이 된다.

'별리'는 4·3을 이미 끝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애도와 화해가 필요한 오늘이자 증언과 기억이 여전히 이어져야 하는 현재로 부각한다. 그래서 해원의 의미를 그저 한풀이에 두지 않는다. 잊힌 사람을 기억의 자리로 불러와 증언하게 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게 한다.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산오락회와 놀이패한라산의 개막굿 '별리'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산오락회와 놀이패한라산의 개막굿 '별리'조훈성


일본의 Team KulKri가 선보인 <까치의 잘라진 하늘>(김철의 작·연출)은 지난해 인천에서 열린 '이중언어연극제'와 '광주국제평화연극제'에서도 선보인 작품이다. 한·일 간 식민지 역사와 전쟁의 상흔을 다루면서 국가폭력과 식민주의에 대한 선명한 문제의식, 그리고 분단과 전쟁이 남긴 상처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작품을 연출한 김철의는 일본 오사카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재일동포 3세 연출가다. 극단 May를 창단한 뒤 자신의 뿌리와 재일동포의 삶 등을 다룬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으며, 현재는 Team KulKri를 이끌고 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45년 여름, 해방을 앞둔 식민지 조선이다. 일본인 여성 하루코와 조선인 소녀 인순이가 서로 다른 민족적·사회적 위치에도 함께 우정을 나눈다는 줄거리지만, 작품은 순수한 소녀들의 정신적 유대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린 두 소녀의 삶과 관계에는 식민지배의 질서와 민족적 차별,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 곧 다가올 해방과 분단의 격랑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거친 옷이 입혀진다. 작품은 그 속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따라가고 있다.

이 작품이 달리 보였던 것은 지금까지도 적대적인 '한일 관계'를 국가 간의 거대 서사나 정치적 대립의 도식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루코와 인순의 우정을 식민지배의 불평등과 차별을 지워버리는 화해의 상징으로 덧붙이지도 않는다.

연극이 포착하고 있는 것은 어린 두 소녀가 서로를 아끼고 함께 연극에 대한 동경을 하는 순간에도 그들 사이에 깊이 자리한 시대의 벽이다. 그래서 '잘라진 하늘'은 매우 상징적인 제목이다. 하늘은 본래 열려 있는 하나의 공간이지만, 식민주의와 전쟁, 국경과 민족주의의 현실 속에서 그 하늘은 단절된 상실의 공간이 된다. 동시에 참혹한 전쟁과 폭력의 불안한 공간이기도 하다.

극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까치'는 경계를 넘나들고 소식을 전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잘라진 하늘에서의 비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소녀가 함께 꿈꾸는 연극은 바로 그 단절된 하늘을 다시 하나로 잇고자 하는 작지만 간절한 몸짓이라 할 수 있다.

돋보였던 것은 어린 배우들이 극중 어린 소녀들의 설렘과 호기심, 시대적 불안과 두려움의 정서를 비교적 생생하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극중 인순과 하루코의 관계를 실감 나게 구체화해냈다.

한편 제주문예회관 야외무대라는 조건에서 여러 제약을 가진 까다로운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정서와 역사적 맥락을 놓치지 않으면서 극적 긴장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일본어로 진행된 공연이었지만 번역 자막도 큰 무리 없이 작품을 이해하게 했고, 사다리와 가면, 천, 작은 소품 등 간소한 무대 장치를 활용해 연극적 상상력의 밀도를 높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이들 장치는 각 인물의 심리적·역사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로 기능했다.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Team KulKri의 '까치의 잘라진 하늘'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Team KulKri의 '까치의 잘라진 하늘'조훈성

동시대 마당극의 확장과 지역 연대

이번 마당극제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또 다른 하나는 4·3 유적지 도령마루에서 열린 '군벵놀이'였다. 공연장이 아닌 유적지에서 진행된 추모의례 퍼포먼스는 4·3의 기억이 추상적인 역사교육이나 박제된 기념물에 머물지 않고, 비극적 장소의 감각과 몸의 움직임을 통해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아이고프로젝트와 참여 예술인들이 함께한 이 작업은 공연과 의례, 추모와 참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도령마루는 단순한 장소적 배경이 아니다. 4·3으로 인한 상실의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참혹한 죽음에 대한 침묵이 있었던 기억의 현장이다.

'군벵놀이'라는 이름이 지닌 토속성과 공동체성의 발현은 4·3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방식을 엄숙하고 정형화된 의례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전통의 승무와 노래, 몸짓, 순례 행렬과 울음 섞인 낭송과 독백 등 다양한 연행의 요소를 통해 깊은 애도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만들어낸 추모의 장면은 완결된 짜임보다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적 의례에 가까웠다. 4·3의 기억을 다루는 예술에서 장소 특정적 작업이 중요한 까닭은 역사적 현장이 어떤 사건이 발생한 특정한 좌표에 그치지 않고, 기억을 불러내 현재의 동시대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기억을 불러내고, 현재의 동시대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왜 어떤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가', 또 '상처 입은 기억을 공동체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새겨질 수밖에 없다.

'내복'과 '달정이와 버들이'는 서로 다른 지역적 배경과 극적 형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안에 담긴 공동체적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내복은 몸 가까이에 닿는 속옷이며,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입는 일상적 계절 의복이다. 이러한 극적 소재는 생활의 애환, 관계의 온기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의 나약함의 상징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1980년 5월, 아들을 잃고 22년 만에 시신을 찾은 오월어머니의 실제 리서치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제주 4·3과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기억과 상실, 남겨진 이가 견뎌온 긴 그리움의 세월을 시종일관 무겁게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한 개인의 상실의 아픔을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하고, 서로 연대하며 위로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다.

<달정이와 버들이>는 옛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하면서, 그 장소의 우물과 버드나무를 의인화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한 자리에서 기억을 지키고 있는 사물과 자연을 통해 대전형무소에 얽힌 슬픈 역사를 한 편의 이야기로 담아낸다.

각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연단체들이 각자의 삶터에서 축적한 이야기와 표현양식으로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기억의 장에서 지역의 고유한 삶과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역사의 상처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형무소 우물 '달정이'의 상징처럼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창작집단쟁이의 '달정이와 버들이'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창작집단쟁이의 '달정이와 버들이'조훈성

내일의 마당 잇기

4·3평화인권마당극제는 제주 4·3에 대한 기억과 추모라는 공동체 해원과 상생의 동시대적 예술무대를 꾸준히 만들고 이어왔다. 그러나 스무 번째를 맞은 지금, 축제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지원예산은 줄어들고 있고, 오랜 시간 마당극제를 이끌어온 놀이패 한라산의 조직적·창작적 부담 또한 가볍지 않을 것이다. 축제의 규모 확대나 관객 개발, 해외교류 네트워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더할 부분이 있는데도 효율적 운영 인력이나 재원의 확보가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제주 4·3은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역사이며, 공동체가 무너졌던 상처의 역사이기도 하다. 제20회 4·3평화인권마당극제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거창한 기억투쟁의 슬로건이 아니라 함께 모여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떠난 이를 부르고 남은 이들의 삶을 보듬는 마당굿의 힘이지 않았을까.

해원과 상생의 마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 4·3의 기억이 계속되려면 이 마당은 어떻게 남아야 할지, 그 잇기의 숨을 제대로 돌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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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나고 자랐으며, 전통연희, 굿, 마당극 등을 연구하고, 또 그 마당을 보러 다녔다. 공연장 안팎을 분주히 걷다 보니,연극, 공연 축제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생업이 되었다. 지역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한 심의, 자문 등의 일도 겸하고 있다. 2024년, 『묵음_ 다음에 걸음, 그리고 스페이스바』 (그래도, 2024) 등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