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Team KulKri의 '까치의 잘라진 하늘'
조훈성
동시대 마당극의 확장과 지역 연대
이번 마당극제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또 다른 하나는 4·3 유적지 도령마루에서 열린 '군벵놀이'였다. 공연장이 아닌 유적지에서 진행된 추모의례 퍼포먼스는 4·3의 기억이 추상적인 역사교육이나 박제된 기념물에 머물지 않고, 비극적 장소의 감각과 몸의 움직임을 통해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아이고프로젝트와 참여 예술인들이 함께한 이 작업은 공연과 의례, 추모와 참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도령마루는 단순한 장소적 배경이 아니다. 4·3으로 인한 상실의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참혹한 죽음에 대한 침묵이 있었던 기억의 현장이다.
'군벵놀이'라는 이름이 지닌 토속성과 공동체성의 발현은 4·3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방식을 엄숙하고 정형화된 의례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전통의 승무와 노래, 몸짓, 순례 행렬과 울음 섞인 낭송과 독백 등 다양한 연행의 요소를 통해 깊은 애도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만들어낸 추모의 장면은 완결된 짜임보다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적 의례에 가까웠다. 4·3의 기억을 다루는 예술에서 장소 특정적 작업이 중요한 까닭은 역사적 현장이 어떤 사건이 발생한 특정한 좌표에 그치지 않고, 기억을 불러내 현재의 동시대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기억을 불러내고, 현재의 동시대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왜 어떤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가', 또 '상처 입은 기억을 공동체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새겨질 수밖에 없다.
'내복'과 '달정이와 버들이'는 서로 다른 지역적 배경과 극적 형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안에 담긴 공동체적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내복은 몸 가까이에 닿는 속옷이며,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입는 일상적 계절 의복이다. 이러한 극적 소재는 생활의 애환, 관계의 온기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의 나약함의 상징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1980년 5월, 아들을 잃고 22년 만에 시신을 찾은 오월어머니의 실제 리서치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제주 4·3과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기억과 상실, 남겨진 이가 견뎌온 긴 그리움의 세월을 시종일관 무겁게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한 개인의 상실의 아픔을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하고, 서로 연대하며 위로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다.
<달정이와 버들이>는 옛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하면서, 그 장소의 우물과 버드나무를 의인화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한 자리에서 기억을 지키고 있는 사물과 자연을 통해 대전형무소에 얽힌 슬픈 역사를 한 편의 이야기로 담아낸다.
각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연단체들이 각자의 삶터에서 축적한 이야기와 표현양식으로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기억의 장에서 지역의 고유한 삶과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역사의 상처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형무소 우물 '달정이'의 상징처럼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제20회4.3평화인권마당극제, 창작집단쟁이의 '달정이와 버들이'조훈성
내일의 마당 잇기
4·3평화인권마당극제는 제주 4·3에 대한 기억과 추모라는 공동체 해원과 상생의 동시대적 예술무대를 꾸준히 만들고 이어왔다. 그러나 스무 번째를 맞은 지금, 축제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지원예산은 줄어들고 있고, 오랜 시간 마당극제를 이끌어온 놀이패 한라산의 조직적·창작적 부담 또한 가볍지 않을 것이다. 축제의 규모 확대나 관객 개발, 해외교류 네트워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더할 부분이 있는데도 효율적 운영 인력이나 재원의 확보가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제주 4·3은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역사이며, 공동체가 무너졌던 상처의 역사이기도 하다. 제20회 4·3평화인권마당극제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거창한 기억투쟁의 슬로건이 아니라 함께 모여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떠난 이를 부르고 남은 이들의 삶을 보듬는 마당굿의 힘이지 않았을까.
해원과 상생의 마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 4·3의 기억이 계속되려면 이 마당은 어떻게 남아야 할지, 그 잇기의 숨을 제대로 돌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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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나고 자랐으며, 전통연희, 굿, 마당극 등을 연구하고, 또 그 마당을 보러 다녔다. 공연장 안팎을 분주히 걷다 보니,연극, 공연 축제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생업이 되었다. 지역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한 심의, 자문 등의 일도 겸하고 있다. 2024년, 『묵음_ 다음에 걸음, 그리고 스페이스바』 (그래도, 2024) 등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