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
(주)시네마 달
주인공은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기로 한다. 바다를 건너는 것도 히치하이킹으로 해결한다.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여정 내내 무임승차는 계속된다.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다. 낯선 타인은 뜻하지 않은 친절과 생명의 위협을 동시에 불러오는 존재다. 물론 꾀죄죄한 히치하이커 역시 운전자에겐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 단순한 진실을 실전을 치러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 대륙에서 더욱 다채로운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이와 운동을 만나며 사유는 깊어진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연례 축제는 그들만의 작은 우주와 다를 바 없다. 휴대전화 사용이나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고, 대안적 공동체의 원칙이 외부의 복잡한 법과 제도 대신 통용된다. 정미는 분위기에 동화 되다가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의심을 거듭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두 세계가 대결하는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의 안식은 어디인지 찾는 것. 다른 활동가와 달리 인류의 미래나 세계 평화 같은 대의명분이 아닌 지극히 개인에서 출발하는 고민이다.
다시 길을 떠나 유럽을 빙 둘러 횡단하던 정미는 현대판 히피들의 카라반에 합류한다. 대형 트럭을 개조한 캠핑카에서 처음 보는 이들이 한데 어울리며 여정은 이어진다. 물론 바람 잘 날 없는 시간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히피들은 국경을 넘을 때마다 당국과 충돌을 빚는 건 물론, 구성원 사이에도 노선과 태도에 따른 갈등이 툭하면 벌어진다. 작은 사회 속 대립은 곧 히피와 펑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지향 사이의 현대 사회운동 논쟁으로 자연히 연결된다.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정미는 수시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난민을 돕는 사회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 아직 해소하지 못한 개인의 고뇌를 풀기 위한 구도의 길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여기에 수십 가지 고민이 접속되며 상황은 계속된다. 일단 계속 길을 가기로 한다. 중부 유럽에서 동유럽, 남유럽으로 여정은 멈추지 않는다. 과연 가능한 일인지 스스로 의심하던 1년이란 시간도 어느덧 끝나간다. 조용한 그리스의 섬에서 정미는 최초 목표를 완수한다.
담요를 입은 사람의 전설 속으로
하지만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행가라면 충분히 책 한 권 내고 남을 여정을 치렀음에도 말이다. 아무래도 1년이란 시간이 주인공을 예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형 시킨 듯하다. 정미는 다시 동쪽으로 향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 향하는 누더기 차림의 주인공은 이제 신비로운 걸식 수행자의 형상을 닮아간다.
'데르비쉬', 즉 '담요를 입은 사람'이란 뜻을 듣게 된 그녀는 자신이 고대의 수행자와 비견 된다는 걸 깨닫는다. 튀르키예에서 이란으로 향한 발걸음, 지금 전화에 휩싸인 땅에서 그녀가 접한 호의와 친절은 2026년 한국 관객에게 영화 외부적인 단상을 던질 만하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이 영화의 귀결은 아니다.
이제 런던에서 품었던 최초의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 1년이 아니라 인생을 건 구도의 길이다. 물론 신비주의 수행이 곧 득도의 길로 직통 하진 않는다. 담요 하나에 의지한 채 미지의 땅에 도사린 수많은 위험과 대면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는 오만함을 경계하라고 절대자가 던지는 시련처럼 탄탄대로 같던 여행에 위기가 닥치곤 한다. 그때마다 실존의 무게를 견디며 사유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정의 결론은 뻔하지 않다.
▲<담요릉 입은 사람> 포스터(주)시네마 달
파란만장 여정은 2022년 <0원으로 사는 삶> 에세이 도서, 2년 후 어떤 생존 서바이벌 다큐멘터리에 못지않을 <담요를 입은 사람> 다큐멘터리 영화로 세상에 공개된다. 영화적 형식보다는 주인공의 삶의 변화가 고스란히 연대기로 구성된 형태에 가깝다. 문법과 이미지 탐구의 미학 대신 대안적 삶을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담보로 도전하는 실험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따라서 영화와 대면하기 위해선 주인공이 품은 고민을 공유하고 개별의 입장을 제출해야 한다.
주인공의 모든 걸 공감하거나 동의할 필요는 없다. 사회적 연대나 대안 공동체 형성 노력보다는 우선순위로 개인의 구원, 혹은 영성 추구를 놓는 선택이 자칫 신비주의로 매몰될 우려를 낳을 구석도 종종 엿보인다. 하지만 동시대 현대 한국인 절대 다수가 감히 의심조차 품기 힘든 시스템 외곽의 삶을 체험하고, 소유의 강박에서 벗어난 삶이 가능함을 실증한 도전은 일상의 헛헛함에 시달리는 관객에게 영감을 주고 용기를 북돋기엔 충분해 보인다.
<작품정보>
담요를 입은 사람
Blanket Wearer
2024 한국 다큐멘터리
2026.09.09. 개봉 117분 12세 관람가
감독 박정미
출연 박정미 외
제작 박정미
배급 ㈜시네마 달
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배급지원상
16회 부산평화영화제 도란도란관객상, 장편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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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