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컷
싸이더스
03.
"걱정 마세요. 제가 수아 연습하는 거 도울게요."
그래서 두 아이는 서로를 부러워하게 된다. 영선은 자신이 애를 써도 얻을 수 없는 것들 것 이미 누리고 있는 수아를 바라본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과 부모의 품, 그리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한 완벽한 환경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영선이 수아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카메라가 잠시 일인칭 시점이 되어 바라보는 풍경 속에 담긴 부러움의 정서가 그 모든 걸 보여준다. 반면, 수아는 영선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러워한다. 진심으로 좋아하기에 테니스 라켓을 잡는다는 것. 적어도 영선은 자신처럼 부모의 기대에 짓눌려서 코트에 서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삶 전체를 바라보고 이해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주어지지 못한 환경 하나를 먼저 발견하고 집요하게 뒤따른다. 그 하나가 어떻게 유지되고 무엇을 대가로 요구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영선이 성우에게 다가갔다는 이유로 괴롭히기 시작하고, 그 일로 수아 부모로부터 마음을 잃게 되자 수아가 '이제 혼자라서 축하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 거리감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적대감만 실린 문장은 아니다. 영선에게 혼자가 된다는 의미는 다시 또 한 번 머물 곳이 불안정해진다는 뜻이지만, 수아에게는 자신이 갖고자 했던 자유의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지점이 맥락 속에 자리한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04.
그렇게 두 사람이 나눠 갖는 감정적 맥락 사이에서 네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대와 공을 주고받는 테니스라는 종목이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 선택된 것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두 아이는 처음부터 동등한 자리에 서 있지 않다. 처음 영선이 이 집에 들어오게 되는 이유부터가 그렇다. 때때로 수아의 사기를 위해 경기를 져 주기도 해야 하는 연습 파트너. 만약 영선이 실력과 재능을 인정받아 성우의 눈에라도 들게 된다면 처음의 구도를 깨뜨릴 가능성이라도 생길 것이다. 영선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며, 자신을 받아들일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자 한다. 수아에게는 함께 공을 칠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지영에게는 보호가 필요한 아이가 되고자 한다. 성우에게도 테니스에 대한 열의와 가능성을 보여 기회를 얻고자 한다. 조금 영악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불편함은 머물 곳을 확보하고 살아가는 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결정권은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수아 가족에게 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영화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컷싸이더스
05.
"제가 운동 열심히 하면요. 아저씨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어요?"
수아의 부모는 모두 각자의 욕망과 불안을 안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된 성우에게 테니스는 충분히 끝내지 못한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수아를 훈련시키는 일에 딸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뒤섞인다. 사고의 원인이 되는 수아가 아버지의 그런 모든 감정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내야 하는 이유다. 지영은 그런 부녀가 공유하는 테니스 코트 바깥 세계에 놓여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가족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은 결국 잘못된 방식으로 딸을 돌보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영선의 등장은 이 가족이 그동안 잘 감춰왔던 여러 불안을 드러내는 트리거가 된다.
결국 자신이 머물 곳을 마련하기만 하면, 수아의 집 문턱만 넘으면 모두 잘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던 영선은 그 안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몸짓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원래 가족인 이들조차 구성원 안에서 각자의 가치를 증명하고 서로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애쓰는 상황 속에서 외부인인 그가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요건을 충족해야 할 테다. 집 내부의 긴장은 그런 방식으로 영선에게까지 옮겨오게 된다.
06.
이 글의 처음에서 '머물 곳이 필요한 영선과 주어진 삶에 묶여버린 수아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두 소녀의 모습을 발견한다.'라고 썼다. 영화가 마련한 모든 이야기를 지나고 나면, 이 문장은 다시 '아이를 보호하는 일과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는 일에 대해 함께 생각하게 된다.' 정도로 옮겨오게 될 것 같다. 안정적인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영선과 이미 제공된 보호 안에서 자신의 의견과 욕망을 말할 여지가 필요한 수아를 돌이켜보면 그렇다. 그런 두 아이를 나란히 둘 때 드러나는 것은 역시 보호와 선택이 함께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영선과 수아에게 필요한 변화는 각자의 생활을 지탱하면서 그 생활이 결정되는 과정에까지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새로운 환경의 코트에서 낯선 테니스 라켓을 다시 잡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영선은 여전히 열다섯 살에 불과하며, 안정적인 거처와 보호가 필요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거처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코트 위에 서던 때와는 분명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그건 반대쪽에 서 있을 수아에게도 마찬가지다. 계속 밀려나지 않을 자리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이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 그것이 영화 <캐리어를 끄는 소녀>가 바라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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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