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배우도, 재능 없는 배우도 아니다... 이용주의 명복을 빌며

[김성호의 씨네만세 1425] <막돼먹은 영애씨>와 배우 이용주

그 존재가 내게 처음 각인된 것은 이제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잊힌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를 통해서였다. 2007년 첫 시즌부터 2019년 마지막 시즌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는 한국 TV 드라마의 변천사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 장을 써 내린 의미 깊은 작품이었다. 무려 17개 시즌, 회차로는 301회차에 이르는 긴 드라마로, 이전까지 한국에선 자리한 적 없는 형식과 구성의 독특한 드라마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전성기가 어디인가를 논하자면 꽤나 오랜 토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건 이 드라마가 이토록 오랫동안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성공적인 이력을 가진 때문이고, 중요할 때마다 무너지는 시리즈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존재들이 등장했던 까닭이다. 그 상당 부분을 매력 있는 배우들이 담당했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기존 다른 매체, 작품에선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여러 배우들은 제각기 시청자들의 폭넓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여기엔 이 드라마 시리즈가 현실과 괴리된 채 점잖 빼는, 혹은 막장으로 치달아 극단적 자극에나 골몰하던 풍조와 달리 대중의 현실에 가까이 다가선 때문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가장 기본된 콘셉트로 '다큐드라마'를 내세운 것만 보아도 그 현실성이 당대엔 꽤나 파격적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이 작품 이후로 회사나 학교, 군대에서 빚어지는 상황을 꽤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모방하는 데 중점을 둔 일련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를 이루었는데, 한국에선 이 드라마 시리즈가 그 시초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막돼먹은 영애씨 스틸컷
▲막돼먹은 영애씨스틸컷tvN

정체된 드라마 활력 불어넣은 인상적 감초

배우 이용주가 이 드라마 시리즈에 합류한 건 2009년 시즌5를 통해서였다. 이로부터 그는 시즌8까지 무려 4시즌을 연달아 비중 있는 배역으로 출연한다. 케이블 채널 드라마 사상 첫 1% 시청률 벽을 부수며 tvN의 개국공신이 된 시즌1의 성공 뒤로, 드라마는 꽤 오랫동안 1% 내외의 시청률에 정체돼 있었다. 주인공인 영애(김현숙 분)를 중심으로 소규모 마케팅업체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장과 직원들이 빚어내는 좌충우돌의 소동기가 꼭 일상을 사는 평범한 소시민의 소소하지만 만만치 않은 삶을 떠올리게 해 인기의 근원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오로지 회사생활 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데는 한계점이 적지 않았다. 드라마는 이를 두 갈래로 뻗어나가는 다른 가지를 통해 보완하였는데, 하나는 영애의 가족 안에서 빚어지는 공감 가는 에피소드, 다른 하나는 다른 드라마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노처녀 영애의 웃픈 애정사였다. 가족과 연애, 그리고 회사라는 설정이 자연스레 등장하는 인물을 제한하는 가운데, 시즌을 거듭할수록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인물의 필요가 대두되게 되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시리즈 가운데 성공적으로 안착한 조연은 그래서 극 전체를 살리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드라마가 여타 작품보다 각 캐릭터와 더 밀접하게 관계 맺는 탓에, 이미 주조연급 캐릭터들은 시청자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시즌 별로 어떤 조연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성패를 좌우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 이용주는 전 시리즈 가운데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해 활약한 몇 되지 않는 캐릭터이자 배우였다. 그가 4시즌을 연속해 출연한 뒤 한 시즌을 쉬고 시즌10, 다시 시즌14로 복귀한 것만 보아도 그 캐릭터가 확고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막돼먹은 영애씨 홍보 이미지
▲막돼먹은 영애씨홍보 이미지tvN

"나 연대 졸업한 토익 900점 넘는 백수야"

이용주가 처음 합류한 시즌5에서 이 드라마는 처음으로 평균 시청률 2%대를 넘긴다. 시리즈 자체 최고 시청률도 경신한다. 이미 2009년엔 tvN을 비롯한 케이블채널 주력 드라마가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톱스타 캐스팅으로 승승장구하며 지상파를 넘어선 때였기에 그리 자랑스러운 성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다. 그러나 해당 시즌은 초반의 참신함을 잃고 급속히 시들던 상황에서 극에 활기를 불어넣고 분위기를 환기하는 작은 도약을 해냈다고 평가할 만하다. 여기에 바로 이용주의 존재가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용주는 당시의 사회상, 특히 고스펙 백수가 넘쳐나던 2000년대 후반 청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명문사학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토익 점수가 900점을 넘는 9급 공무원 출신 백수의 독특한 설정이 특유의 어수룩하고 예민하면서도 자존심은 살아 있는 캐릭터와 맞물리며 극에 보기 드문 즐거움을 더했다. 2004년 서세원의 <도마, 안중근>에 출연하며 배우로써 정식 데뷔한 이용주지만 <막돼먹은 영애씨> 전까지는 대중의 뇌리에 박히는 배역을 맡지 못하던 차였다. 마침 저예산으로 기획돼 다른 곳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이들에게 적극 손을 내민 이 작품과 만나 제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시즌5는 이용주와 같은 새 얼굴을 영입하고, 극중 회사도 규모 있는 중견기업 그린기획으로 합병돼 주인공 영애가 다시 인턴으로 일을 시작한다는 설정을 더해 흔들리던 시즌을 다시 정상궤도에 안착시킨 의미 깊은 시즌이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빠지던 적잖은 조연, 감초들과 달리 이용주가 이후 여러 시즌을 함께 하며 대중에게 제 존재를 각인시킨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이 작품의 성공 뒤 2012년부터 tvN 병영시트콤 <푸른거탑>에 합류해 배우 인생의 전기를 마련한 데는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쌓아 올린 존재감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용주 <푸른거탑> 홍보사진
▲이용주<푸른거탑> 홍보사진tvN

실패한 배우도, 재능 없는 배우도 아니다

배우 이용주가 지난달 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졌고, 그가 과거 '심근비대증' 지병이 있었다고 밝힌 사실이 재조명됐다. 향년 44세,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푸른거탑> 시리즈 이후로 설 자리를 찾지 못했고, 다른 많은 조연급 배우들처럼 코로나19 이후 줄어든 작품 제작 경향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막돼먹은 영애씨>와 <푸른거탑>에서 쌓아올린 캐릭터가 다분히 특징적인 관계로, 정극연기에서 도리어 해가 된다는 쉬운 평가 또한 벗기가 어려웠을 테다. 2022년 이후로 아예 배우활동을 멈추었던 그가 어느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하고 싶은 것'과 '잘 하는 것' 사이의 고뇌를 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배우로 해낸 것이 결코 작지 않았단 걸 알기에 나는 그가 스스로의 연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짓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이용주는 스타가 아니었다. 소위 천만영화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는 배우도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다양한 작품, 매력적인 캐릭터를 제안 받는 배우도 아니었다. 커리어라곤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와 <푸른거탑>, 두 작품의 얼마 다르지 않은 방식의 연기를 펼치는 배역이 고작이다. 무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전에 소화한 캐릭터가 배우 본인의 이미지를 압도할 만큼 강하여 도리어 해가 된다고 판단받기 일쑤였을 테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이용주는 결코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는 배우다. 그가 연기한 앞의 두 작품에서만큼은 그는 다른 누구보다 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힘을 보탠 덕분에 작품은 한 시대, 많은 이들에게 가서 닿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용주의 캐릭터가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이도 있었을 테다.

영화평론가로 영화계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다니자면, 그와 같은 기회를 얻고도 살리지 못하는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단 걸 실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빠른 퇴장을 안타까워한다. 열정과 가능성을 가진 배우를 품기에 한국의 작품세계가 너무나 좁았다고 여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막돼먹은 영애씨 포스터
▲막돼먹은 영애씨포스터tvN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막돼먹은영애씨 이용주 부고 푸른거탑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