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프로젝트그룹 일다
비즐러는 각종 매체에서 전쟁 혹은 냉전 시기를 표현할 때 많이 사용하는 소재인 '악의 평범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나의 기계 부품이 되어 죄 의식 없이 악을 저지르고, 악을 범하는 행위가 그의 일이 되어버린 나머지 악행이 곧 성과로 포장되어 인정받는 인물이다.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지적한 바와 같이, 비즐러에게서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과 '판단의 무능'이 발견된다.
하지만 <타인의 삶>은 악의 평범성이나 악의 태동 과정을 조명하는 연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기계적으로 악을 행하던 비즐러가 어떻게 선의를 갖게 되는지, 악 속에서 선이 태동하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반국가적 행동'을 인지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린 햄프 장관이 드라이만의 연인 크리스타를 성적으로 취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또 그동안 겉에서 바라봤던 드라이만이 아니라 진짜 한 사람으로 생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드라이만의 삶을 목격한다. 그리고 드라이만과 얽혀있는 예술가들의 삶도 확인하게 되는데, 그중에는 검열을 앞세운 문화 정책으로 더 이상 연극을 만들 수 없게 된 연출가 알베르트 예르스카도 있다.
비즐러는 흔들린다. 강한 신념은 타인의 삶을 납작하게 만들곤 한다. 반대로 타인의 삶을 제대로 직시한다면, 삶을 뭉개버린 강한 신념은 곧 흔들리고 만다. 비즐러가 대의를 위한 도덕적 행동이라고 믿었던 것이 상사의 사익을 위한 일의 일환이기도 했음을 인지하는 순간,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감정적인 삶을 다른 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비즐러는 멈칫하게 된다.
바로 이 '멈칫'하는 짧은 순간이 악 속에서 선을 태동시킨다. 여기에 더해 국가보위부와 문화당국에 의해 꿈이 짓밟힌 연출가 예르스카가 남기고 간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도 비즐러의 마음을 흔든다. 연극 <타인의 삶>은 제목 그대로 '타인의 삶'이, 그리고 권력이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약한 예술이, 결국 신념을 무너뜨리고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프로젝트그룹 일다
극 중 비즐러가 듣게 되는 대사들이 그를 점진적으로 흔들어놓는 과정, 그 속에서 느껴지는 비즐러의 감정 동요도 볼 만하다. 드라이만과 예르스카의 대화 과정을 도청하던 비즐러는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지 않을까"라는 말을 듣고 일차적으로 흔들린다. 자신과 같은 슈타지를 욕하는 아이에게서 듣게 된 "아저씨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라는 말, 그리고 크리스타에게서 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비즐러로 하여금 '다른 삶'도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듯하다.
연극 <타인의 삶>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영화 <타인의 삶>을 원작으로 삼아, 손상규의 각색과 연출을 거쳐 탄생했다. 연극 말미에서 그동안 드라이만을 감싸고 있던 도청 장치들이 쏟아지는 장면 등 손상규가 구상한, 원작에는 없는 연극적 장치들도 볼 만하다.
여기에 윤나무·이동휘(비즐러 역), 정승길·장승조(드라이만 역), 우정원·임수향(크리스타 역), 김수현·김정호(햄프 역), 이호철(그루비츠 역), 박성민(우도 역) 등이 힘을 보탠다. 공연은 오는 13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스테이지에서 관객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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