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S고원에서' 공연 전 무대
조훈성
비련을 거부하는 돌봄의 풍경
<S고원에서>의 짙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무엇보다 요양원이라는 공간을 다루는 데 방식에서 비롯된다. 시한부 환자들이 머무는 곳, 곧 닥쳐올 죽음의 예감이 일상적으로 깃든 곳은 자칫 인물의 소외와 고립립에 의한 회의감, 고통과 상실의 극렬한 감정의 용광로로 무대형상화 되기 쉽다. 관객은 이미 예고나 다름없는 슬픔의 감정을 언도 받았으며, 극중 인물들은 비련의 주체로 배치되며, 죽음은 하나의 거대한 클라이맥스로 장치되는 게 당연시된다. 이때의 돌봄은 대개 숭고하거나 처절한 희생의 상징으로 표현되기 일쑤다.
그러나 연극은 그 익숙한 문법을 택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각 인물마다 다양한 개성을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사건이 아니다. 요양원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환후를 갖고 있으며, 그 고통을 대하는 방식도 각자가 감내해야만 하는 것으로 주체적이고 의지적이다. 각자는 끝을 예감하고 있지만 그들은 오직 '죽어가는 사람'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극중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는 저마다 독특한 말투와 개성이 뚜렷하다. 긴밀하지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생활의 농담이 있고, 관계의 결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고집스럽고, 어떤 이는 엉뚱하며, 어떤 이는 타인의 시선을 피하고, 어떤 이는 작고 사소한 일에도 근심을 붙인다.
이 점에서 <S고원에서>이 만들어내는 정서는 연민보다 더 복합적이다. 관객은 인물들을 불쌍히 여기기 이전에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의 불편한 몸짓, 쉽게 끝나지 않는 대화, 무심하게 오가는 말, 낮잠이나 산책 같은 행위가 장면을 구성한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지만, 어쩌면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시간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삶은 대개 결정적 장면보다 그 사이에 놓인 무수한 자잘한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돌봄의 대상이 감상적 비극의 인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는 고통을 지워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하나의 표정으로만 고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연극은 응접실에 모였다 흩어지는 이들의 관계 속에서 임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S고원에서>는 바로 그 복수성과 생활성 속에서 각 인물의 존엄을 발견하게 한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을 숭고하게 또는 애련의 대상으로 박제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일관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파도처럼 이어지는 존재들
작품의 분위기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힘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나온다. 각 인물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말하며, 타인과 충돌하거나 비껴선다. 그 개성은 과장된 캐릭터 연기에 기대지 않는다. 그래서 무대 위 사람들은 '요양원 시한부 환자'라는 집단적 표지에 갇히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시간을 통과해 이곳에 온 사람들처럼 보여지게 한다는 점에서 이 연극의 각 인물들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 개별성들이 전체의 균형을 깨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다음 장면의 정서를 밀어 올리기도 하는데, 잔잔한 물결의 파동,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쉽게 드러내지 않는 깊은 서사적 흐름이 존재한다.
따라서 <S고원에서>의 극적 형상화는 거대한 사건을 단번에 폭발시키는 데 있지 않다. 작은 생활 장면이 누적되면서 관객은 극중 각 인물들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그 지연과 지속이야말로 이 연극 연출에서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작품 속에서 "바람이 이누나! 살어나 보련다"라는 발레리의 시가 차용되는 순간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죽음이 가까운 자리에서조차 삶이 여전히 감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몸이 그것을 느낀다는 뜻이고, 바람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 잠깐 눈을 붙이는 일, 창밖을 바라보는 일, 몸이 허락하는 만큼 산책하는 일, 타인의 손을 잡거나 손을 놓아주는 일. 연극이 의미 있게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작고 구체적인 생의 행위들이다. 그것은 애도를 부정하는 냉정한 태도라기보다, 죽음을 생명의 반대편에 세우지 않고 변화의 연속으로 바라보려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극중 인물들의 시종일관 담담한 정서의 유지는 살아있는 이들의 관계를 일상에 두면서 서로의 시간을 더 섬세하게 바라보게 한다.
누군가 오고, 누군가 떠나고
이 작품에서 특히 오래 남는 것은 '쉼'의 문제다. 낮잠과 산책,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은 극적 사건의 공백이 아니다. 우리는 대개 삶을 성취와 속도, 생산성과 목표에 둬왔다. 하지만 삶의 끝이 눈앞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떠오르는 것은, 이전에 미뤄두었던 휴식과 관계의 시간일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누구와 천천히 걷고 싶었는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었는가. 바람을 느끼고, 햇빛을 받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하는 되새김의 시간을 갖게 된다. 한편, 극중 AI 로봇의 등장은 이 연극이 단지 요양원 안 환자 사연에만 머물지 않도록 한다. 돌봄의 영역이 이제 점점 기술과 제도로 큰 전환기를 맡게 될 미래사회의 한 단면을 또 확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또다른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과연 이 기술이 앞으로 인간적 돌봄을 대체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S고원에서>는 죽음과 고립, 돌봄과 기술을 엮어 어떤 비장한 장면으로 만들기보다, 그저 요양소 안 사람들의 일상의 숨소리를 생활의 풍경 속에 그대로 가져다 놓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더 깊게 그 삶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공연 내내 암전이 없다가 마지막 서서히 어두워지는 조명, 그윽해진다는 말이 맞겠다. 짧았던 아니 길었던 온 하루가 저물어가는 느낌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잠시의 어둠 속에서 암전 이전의 모든 시간, 인물들이 나눴던 말과 말 사이의 공기, 아무 일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간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해내려 애썼던 발레리의 문장은 한 번 되뇌어 보게 된다.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봐야겠다." 누군가 오고, 누군가 떠나고, 대화가 끝나는 듯하다 다시 이어지고, 잠깐의 침묵도 그렇게 하나의 생활의 조각이 된다. 한꺼번에 꺼지는 암전보다 더 천천히 무대가 어두워질 때, 그것은 극적인 한 죽음의 신호처럼 보이면서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저무는 것처럼 그 느린 어둠 속에서 나는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분명 느꼈다.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S고원에서' 커튼콜조훈성
<S고원에서>(26.08.29)
∙제작_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공연_2026년 8월 21일~30일
∙장소_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원작_히라타 오리자
∙번역·윤색·연출_성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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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나고 자랐으며, 전통연희, 굿, 마당극 등을 연구하고, 또 그 마당을 보러 다녔다. 공연장 안팎을 분주히 걷다 보니,연극, 공연 축제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생업이 되었다. 지역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한 심의, 자문 등의 일도 겸하고 있다. 2024년, 『묵음_ 다음에 걸음, 그리고 스페이스바』 (그래도, 2024) 등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