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좋으면 다 좋을까? 모두의 해피엔딩 위해 놓아버린 것들

[김성호의 씨네만세 1431] <카를로비바리>

그런 작품들이 있다. 대단원에 이르러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모든 인물이 활짝 웃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노력이 배신되고 선의가 훼손되기 일쑤인 현실 가운데서 해피엔딩이란 얼마만큼 만나기 어려운가. 하물며 엮인 모두의 해피엔딩이라면 이루기가 더욱 어려울 테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그 어려움에 도전한다.

그렇다. 도전이다. 이루기 어려워서 도전이고, 감당할 것이 또한 커서 도전이다. 해피엔딩의 행복은 누구에게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에 따르는 어려움을 감당하는 작업은 누구에게나 버거운 것이다. 그리하여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는 못난 본능은 결과만 삼키고 수고는 뱉으려 든다. 대개 결과는 쉽게 드러나지만 수고는 쉽게 감춰지는 법이다. 걸리지만 않으면 장땡이라는 판단 아래, 감당해야 할 수고를 내팽개치는 극이 흔하게 발견되는 이유다.

개중 그나마 좋은 사례는 <써니>다. 2011년 개봉해 7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흥행작으로, 심은경, 강소라, 남보라, 박진주 등 젊은 여성 배우들이 고루 활약한 웰메이드 상업영화다. 15년이 되도록 회자되는 이 영화는 한국영화 전성기에 등장한 좋은 연출자와 복고란 흐름을 읽어낸 성공적 기획의 만남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 없다. 장년에 이른 친구들의 모든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는 성공한 친구, 모든 문제가 갑자기 주어지는 돈으로 해소되는 결말은 쉬워도 너무 쉽고 우연적이어도 너무나 우연적이지 않았나. 누가 이 영화를 가리켜 물신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당대 한국의 정체성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평을 한 대도 나는 감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테다.

카를로비바리 스틸컷
▲카를로비바리스틸컷라온컴퍼니플러스

어떤 꿀단지는 함정이다

신작 <카를로비바리>를 이야기하며 이와 같은 사례를 언급하는 건 너무 많은 작품이 같은 구덩이에 빠져드는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천연 벌꿀이 가득 든 단지처럼 보이겠으나 일단 발을 들이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란 걸 비평가라면 마땅히 지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와 같은 경향이 그치지 않고 같은 잘못을 거듭하는 작가 또한 적지 않음에도 이를 지적하는 이가 없으므로 구태여 비판으로 글을 시작할 밖에 없다.

<카를로비바리>는 최근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용석 감독의 장편 극영화다. 광고업계에서 잔뼈 굵은 연출가로, 자신이 설립한 영상제작업체를 토대로 지난 2016년부터 영화 제작에 본격 뛰어들었다. 지난해부터 제작한 영화만 해도 <포킴스> <카를로비바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 여러 편이고, 드라마까지 더하면 더 많은 작품이 그의 연출을 거쳐 공개됐거나 공개 예정에 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OTT 서비스의 배급망을 타고 한국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처럼 한 명의 작가가 장편영화 연출에서 다작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카를로비바리>는 기본적으로 메타영화다. 작품 안에서 영화를 찍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금융회사 임원인 친척 형 진철(오지호 분)에게 기대 제작비 12억 원짜리 저예산 영화로 입봉하려는 성재(이제연 분)가 주인공이다. 절친한 후배인 하나(신지원 분)를 촬영스태프로, 매형 건(강희만 분)을 음향스태프로 삼아 촬영에 나섰지만 돈을 관리하던 후배 PD가 스미싱이 의심되는 사건에 연루돼 실종되며 2할 가량 남은 촬영분을 찍지 못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 남은 게 하필 체코 카를로비바리로 해외 촬영을 나가야 하는 부분이라 영화 전체가 엎어지기 직전이다.

카를로비바리 스틸컷
▲카를로비바리스틸컷라온컴퍼니플러스

메타영화 설정으로 이루려는 것

영화는 엎어질 영화를 어떻게든 되살리려는 이들의 이야기다. 당장 제가 추천한 작품이 자빠져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 하게 생긴 진철이 뛰어들고, 컴퓨터그래픽으로 현지로케를 대신하기 위해 불러들인 성재의 군대후임 종필(이명훈 분)도 합류한다. 특히 종필은 게임업계를 주름잡았던 CG업계의 은둔고수로, 당황스럽게도 현재는 아버지의 중식당에서 요리와 서빙을 하며 살고 있다. 제작비 떨어진 성재의 부름에도 이들 모두가 분투하며 어떻게든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상황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이야기가 곧 영화의 처음이자 끝을 이룬다.

처음은 투자다. 대표투자자는 이미 있으니 큰 대가 없이 손 벌려 줄 귀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악연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성공한 선배를 찾아간 성재지만, 과거의 악연은 현재에도 악연임을 확인할 뿐이다. 결국 촬영팀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겨우겨우 모은 돈으로 촬영을 재개하는데, 당연하게도 따르는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늘어진 촬영기간 때문에 합류가 불투명했던 주연배우 미소(박시연 분)가 앞의 악연인 선배 감독의 작품에 붙들려 있는 탓으로, 그녀를 끌어오기까지가 큰 과제가 된다.

<카를로비바리>가 기대는 지점은 빤하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뭉치는 팀원들의 우정과 희생, 극복의 이야기가 가장 큰 기둥이다. 도전 앞엔 마땅히 저항이 배치돼야 한단 건 법칙화된 지 벌써 2300년도 더 된 오랜 공식이 아닌가. 그 저항을 악연으로 악역이 되는 성공한 선배 한 명이 책임진다. 성공한 선배의 온갖 저열한 방해공작을 무릅쓰고서 성재와 촬영팀은 작품 완성에 다가선다.

카를로비바리 스틸컷
▲카를로비바리스틸컷라온컴퍼니플러스

예고된 목적지로 순항하는

로케는 없어도 상관없다.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단 게 이들의 계획이다. 그렇다면 영화예술에 있어 현실과 현장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찐과 짭, 그러니까 연출적 재능이며 영화를 향한 마음가짐에 있어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는 영화에서 이에 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당혹스런 대목이다. 성재와 촬영팀이 목표하는 성취가 동유럽을 대표하는 영화제인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수상이란 걸 놓고 보면, 이와 같은 무신경함이 민망하게까지 느껴진다.

무튼 <카를로비바리>는 예고된 목적지를 향해 순항한다. 배치된 위기 모두가 좌초가 아닌 모험의 필요조건으로써 기능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작품을 완성한다. 우정은 두터워진다. 사랑 또한 싹튼다. 작품이 모두를 구하지는 않는대도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구원 가까운 무엇이 되어주는 듯도 하다. 영화가 이에 별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주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카를로비바리> 앞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테다. 하나는 결과와 상관없이, 보다 정확히는 결과를 초월하는 가치의 발견이다. 영화가 수상하거나 어떤 상업적 성공을 가져오지 않는대도 영화가 천착한 것, 그러니까 역경을 뚫고 작품을 완성해내는 과정에서의 의미를 구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역경을 뚫는 과정을 극적으로 활용해 재미를 짜내지만, 그로부터 의미를 길어내는 데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다른 길을 택한다. 글 서두에 언급했듯 훨씬 많은 창작자가 밟아가는 흔한 방향이다. 영화가 가져온 성취, 또 동시에 주어지는 거의 우연이나 기연처럼 맞이하는 돈벼락이다. 영화 속 영화 촬영팀은 바로 이 같은 결과에 의해 저들의 모든 현재적 어려움을 넘어선다. 말하자면 결괏값으로 증명되는 성공이고 성취다.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보여준 것보다도 결괏값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듯이, 현재적 어려움을 해치우는 결과가 영화의 결말로 자리한다.

카를로비바리 포스터
▲카를로비바리포스터라온컴퍼니플러스

가지 않는 길을 가야 영화다

만약 달랐다면 어떨까. 이들에게 돈이 쏟아지지 않고, 영화제에서 성취도 없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고생은 고생일 뿐이고, 보상과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헛힘 뺀 실패의 기록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감독이 내린 답이 영화 가운데 과정을 대하는 연출적 자세가 된다. 위기와 극복의 과정이 지닌 의미가 결괏값에 의해 달라지는 만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서와 감각과 사상 따위는 주목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결과가 확인됐을 때 의미를 가질 저항으로써만 과정이 의미를 갖는다. 그때 우리 참 힘들었지, 하지만 결과는 좋았잖아, 한 잔 해. 그런 영화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들이 찍는 영화가 무엇인지, 무얼 말하려 하는지, 그 내용에 대해선 촬영지며 배우 말고는 간략한 언급조차 없는 것이다. 성재가 찍으려 한 영화가 무엇이냐에 따라 작품이 훨씬 풍요롭고 다채로워질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그대로 영화가 현실을 구하지 못한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엉망진창인 현실 가운데서 모두를 구하는 기적은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를로비바리> 속 인물들이 맞이하는 해피엔딩은 이례적 성공기의 완성으로 박제될 뿐이다. 마치 위인전이나 경전, 자기계발서처럼 말이다. 극영화가 나아갈 길이 과연 이것인가. 모두를 구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모두를 구하는 동화를 그려 안도하거나 헛된 희망을 캐게 하는 것일 뿐인가. 영화예술이란 관객에게 가 닿아 그를 움직이는 것, 그리하여 현실을 변화케 하는 것이다.

OTT 시대에 작품양산 체제에 돌입한 일선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라면, 그 방식에서 망실되는 영화와 드라마, 곧 영상예술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할 책임이 있다. 돈으로, 또 수상이란 외부적 선택으로써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도록 하는 쉬운 결말이 이를 보는 관객과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단 한 번이라도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수용을 전제로 한 창작자, 관객을 염두에 두는 감독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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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