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거시적인 입장에서 내려다보지 않아도 씨네마떼크는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문화학교 서울'에 발을 들이기 전의 나는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결핍된 시간을 십 수 년 보냈구나 하는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는 인간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니 누려야 하는 것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제공할 수 있는 루트를 의지적으로 차단하기도 한다. (중략)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든 인간은 진정한 감동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정서적인 고양을 일으킬 수 있는 문화적인 토양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런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씨네마떼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노경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 <독립영화 9호> 75, 76p,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계속 할 겁니다" 중에서
졸린 눈으로 읽어나가다 깜짝 놀랐다. 발간 25년이 지난 영화잡지 <독립영화> 9번째 권을 읽던 중이었다. 당대 최대 독립영화제인 '인디포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행사 주최단체 문화학교 서울의 사무국장 김노경과 가진 인터뷰였다. 단체와 개인의 이력, 정체성 등을 묻는 질문과 응답이 오가던 중 시네마테크의 필요에 대한 응답이 나오는 대목이다.
김노경이 내놓는 답변 안에는 현실 가운데 얼마 들어본 적 없는 주장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의 시민은 마땅히 진정한 감동을 느끼고 정서적 고양을 일으킬 수 있는 문화적 토양 위에 살아야 하는가. 인간적으로 누릴 수 있고, 누려야만 하는 것을 국가는 차단하고 있는가. 시네마테크라는 기관이 자리하면 그를 해낼 수가 있는가. 그 답변으로부터 이와 같은 질문을 꺼내는 건 25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담론이다.
▲독립영화 9호책 표지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 독립영화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나
이달 1일 저녁 서울 마포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실에서 '<독립영화> 다시 읽기' 9번째 모임이 열렸다. 한때 한국독립영화협회 주력사업으로 독립영화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잡지가 이제는 명맥만 간신히 이어오고 있는 지금, 동료 비평가와 감독,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과 함께 '<독립영화> 다시읽기' 모임을 연 건 낯선 시도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필자가 처음 이를 제안했을 당시 몇몇 이들이 내게 다가와 구태여 지난 잡지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의지는 분명했다. 지난해부터 이 잡지 운영위원으로 합류한 상황에서, 첫 호부터 그간 발간된 잡지 전체를 하나씩 공들여 살펴보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그건 그대로 한국 독립영화계가 걸어온 자랑스럽고 또 실망스런 순간들을 복기하는 작업이며, 동시에 정체돼 있는 한국독립영화협회와 한국 독립영화의 설 자리를 가늠하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장에 발 담근 이들이 직접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 현장의 이야기란 점에서, 이 잡지는 그저 정찰과 평가가 아닌 도전과 실패, 응전과 패배의 기록이기도 했다. 한국 독립영화는 대체 무엇이기에 한국사회 공동체와 예술, 영화와 운동의 영역에 제 자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자리는 여전히 유효한 걸까. 진정으로 닿고 싶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앞선 8호부터 계간지, 즉 봄·여름·가을·겨울에 각 1번씩 발간하는 잡지로 개편한 <독립영화>다. 들끓는 의지와 부족한 역량, 산재한 문제와 격렬한 문제의식 사이에서 이 잡지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을 다시금 가다듬은 뒤 나온 두 번째 권이란 점에서 흥미가 가는 구석이 적잖다. 9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것은 영화제다. 가장 힘 주어 편성한 꼭지들은 이해 봄부터 여름 사이 있었던 세 개의 영화제, 2회 전주국제영화제와 2001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영화계 최대 축제로 자리매김한 인디포럼 2001을 다룬다. 인디포럼 운영이 파행에 이르러 더는 이어지지 못하는 지금, 앞날 창창한 축제로 기능하던 사반세기 전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읽힌다.
우선 9호에 대한 총평부터 해야겠다. 지난 잡지들에 비해 실린 글의 깊이와 문제의식, 수준 등에서 다소 아쉬운 호였다. 계간지 개편 뒤 야심차게 편집의 틀은 정하였으나, 아직 소속 기자 수도 부족하고 외부 필자 섭외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던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요컨대 연 4회 발간하는 계간지를 만드는 데서도 역량부족이 엿보인다는 뜻이겠다. 조직에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단 건 오늘까지 이어지는 고질적 문제다. <독립영화>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잡지라면 보다 많은 지원이 따라야 하는 게 아닐까. 이와 같은 잡지가 역할을 다하는 해외 사례에 비추어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또 그에 앞서 제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실력과 수고가 아쉬운 대목이다.
▲서울영화센터홈페이지 캡처
서울문화센터
한국 시네마테크의 현재와 미래
그럼에도 막 피어나던 영화제와 출품작을 다루는 글이 당대 독립영화계 분위기를 현장감 있게 전한단 건 고무적이다. 인디포럼 2001의 이모저모로 시작해 주최단체인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 인터뷰로까지 이어지는 폭넓은 관심은 독자로 하여금 독립영화의 외연이 어디로부터 어디까지 펼쳐지고 있으며, 그 경향과 지향이 어떠한지를 확인하게 하는 충실한 근거가 된다.
이날 모임의 발제는 필자가 맡았다. 지난 반 년 간 본 잡지들 가운데 가장 전격적으로 영화제를 다뤘다는 점, 또 영화도서관인 '시네마테크'의 역할과 필요에 대한 환기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관련 꼭지를 발제거리로 꼽아 나누었다. 이중에서도 글 서두에 언급한 시네마테크에 대한 생각 나눔이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오늘날 한국에서 시네마테크가 갖는 기능, 아직 감당치 못하고 있는 역할, 앞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 등을 논하였다.
시네마테크는 영화문화의 중심지다.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운 영화 관련 자료를 모으는 수장고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 만나기 어려운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이자, 관련 논의며 담론을 진작하는 학술적이고 문화적 중심지가 된다. 한국영상자료원, 부산 영화의전당, 서울영화센터, 서울아트시네마 등이 대표적인 시네마테크로 기능해온 가운데, 민간 독립예술영화상영관들이 일부 역할을 분담하는 형태다.
▲독립영화책 내지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에도 공공 OTT 서비스가 생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시네마테크가 갖는 공간적 제약에 더해 이들 기관이 여러 이유로 주어진 역할을 제한적으로만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겠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어째서 한국엔 한국 고전영화나 독립영화를 온라인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공공 OTT 서비스 체계가 구축되지 못한 걸까. 캐나다와 영국 등 관련된 사업을 진척시키고 있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한국의 차이가 어디서 유래하는지, 또 현실화시킬 가능성이 있는지를 논의하였다.
국민 일반의 관심이 없다는 점부터, 언론의 부족한 이해, 국가기관과 정치의 무책임 등 다양한 이유가 결합해 작용하는 복잡한 문제다. 그중에서도 성공적인 국가와 한국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결국 세수의 분배, 그 차이가 불러온 자원의 부족에 있다. 극장 표값 3%를 영화발전기금으로 징수하던 기존 제도를 폐지하는 등 독립영화로 흘러드는 재원이 축소되는 현실 가운데, 미래를 바라보고 큰 변화를 꾀할 동력까지 상실되는 모습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민간 OTT 서비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영화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소외된 영화가 지닌 유효함마저 없는 것처럼 치부돼선 안 될 일이다. 자본이 부족하단 이유로 유효함마저 부족하다 평가받는 건 너무나도 부당하다. 시민에게 진정한 감동과 정서적 고양을 줄 책임이 사회와 국가에 있다면,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황폐화되고 있는 독립영화의 텃밭을 관리하는 건 그저 독립영화계 인사들만의 책임으로 남겨져선 안 되는 문제다. 이 텃밭에서만 일어나는 아름다움이, 도덕적 고양과 정서적 충족, 진정한 감동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때문이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발간하는 <독립영화> 잡지 전 호는 지자체 도서관이 무료 지원하는 디비피아를 통해 온라인으로, 국회도서관과 한국영상자료원 등 기관에서 실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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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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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와 독립영화 볼 수 있는 공공 OTT 서비스, 왜 한국엔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