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송이 헌화했다가 구금된 여성

[넘버링 무비 556]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스틸컷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스틸컷EBS 국제다큐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우리가 꽃을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모두 치워버리죠."

2024년 2월 16일 러시아 야권 지도자이자 반부패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시민들은 모스크바의 '슬픔의 벽'으로 향한다. 스탈린 시대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소는 공교롭게도 2017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제막했던 기념물이다. 하지만 나발니를 추모하기 위해 쌓이기 시작한 꽃들은 공권력에 의해 치워지기 시작하고, 이를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 역시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과거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 국가가 마련한 장소에서 현재의 국가 권력을 비판적으로 기억하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 역설. 이 모순 위에서 아나스타시야 베덴스카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웬 아이 겟 제일드>(When IGet Jailed)가 시작된다.

그 중심에는 알료나 그리브코바가 있다. 금발의 곱슬머리와 분홍색 외투로 인해 군중 속에서 쉽게 눈에 띄는 여성.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꽃 한 송이를 들고 추모 현장을 찾았던 그는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당일 경고를 받고 풀려난다. 하지만 당국은 이후에도 추모에 참여한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알료나 역시 보름이 지난 3월 5일에 다시 체포되고 만다. 감시카메라 영상을 이용해 지켜보고 있던 당국과 모스크바 지방법원이 허가받지 않은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7일간의 행정구류를 선고한 것이다.

02.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두 번의 체포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행위지만 두 장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먼저, 추모 현장에서의 체포는 행위의 현장 위에서 이루어진다. 실제로 그 체포가 가진 정당성과 당위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은 사건과 장소, 행위자가 객관적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후의 두 번째 체포에는 일방적인 판단과 지시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차이는 <웬 아이 겟 제일드>가 독재 체제에서 공포가 작동해 왔던 오랜 방법 가운데 하나를 매우 현대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에 등장하는 법정 장면에서의 가치 판단과도 의미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해당 장면에서 법원은 알료나에게 러시아 행정법상 집회 개최 및 참여 규정 위반에 관한 조항을 문제 삼는다. 시민이 추모 장소에서 헌화하는 행위가 경찰 기록과 법률 조항을 통과하며 허가받지 않은 집회에 참가한 행위로 탈바꿈되는 것. 여기에서 강하게 작용하는 힘은 '무엇을 집회라고 부르고, 무엇을 위험한 행위인지 규정하고 판단할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두 장면에는 모두 국가가 감시를 시행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시민 개개인의 인식 내부에 침묵을 강요하는 위력을 심어 두고, 시민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 범위를 좁혀가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스틸컷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스틸컷EBS 국제다큐영화제

03.
"엄마는 계속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도 여긴 우리가 살아갈 나라잖아요."

영화가 알료나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모녀 사이의 대화와 공권력과 알료나 사이의 시간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그는 딸의 행동을 정치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알료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는 그 행동으로 인해 사랑하는 자식을 잃게 될 수도 있다며 두려워한다. 공포는 대중의 지지와 호의를 얻지 않고서도,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이들의 마음을 이용해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알료나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그의 곁을 지키는 이들의 존재다.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연대하고,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법정에 선 알료나를 변호하기 위한 이들이 있다. 여기에는 영화 바깥에 서 있는 아나스타시야 베덴스카야 감독 또한 포함된다. 이들의 행동은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딸을 잃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음만큼이나 뜨겁다. 어떤 정치적 해석과 물리적 압박 가운데서도 서로를 놓지 않고자 하는 것만큼은 양쪽 모두에서 느낄 수 있다. 서로 다른 방법일 뿐이다.

04.
이 작품에는 나발니의 죽음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알료나라는 명확한 인물의 시간을 통해 시민들의 선택에 큰 변화를 일으킨 계기로 설명하고 있다는 명확한 장점이 있다. 그만큼 한계도 존재한다. 현재 러시아 정치체제의 구조와는 연결되지 못하며, 중심에 두고 있는 인물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이끌어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런 좁은 영역을 다뤄내는 동안 우리는 어떤 정치적 현실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얼마나 빠르고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사건으로 발화되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베덴스카야 감독이 연대와 연결의 모습을 화면으로부터 놓지 않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항의 승리가 아니다. 국가의 위력에도 헌화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해할 수 없는 구금 앞에서도 정당한 자리에 시민은 결집한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기억을 기억하는 카메라가 증인처럼 남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유가 사라지지 않도록 행동을 이어가는 이들로 인해 사회는 나아갈 수 있다.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스틸컷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웬 아이 겟 제일드> 스틸컷EBS 국제다큐영화제

05.
"악이 승리하는 이유는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동하라"

영화의 마지막에서 법원은 결국 알료나에게 구금 명령을 내린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위반행위에 대한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피고인 측의 모든 주장은 무시되었고, 변호인의 요청에 대한 답변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현실은 그저 헌화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어진 결과다. 국가가 한 개인의 행동을 어디까지 정치적인 것으로 물들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이 다큐멘터리가 남기는 마지막 물음이다.
다큐멘터리 EBS국제다큐영화제 EIDF 웬아이겟제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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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