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짧은 영상 하나를 보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한 사람이 카메라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표정도 자연스러웠고 목소리와 입술의 움직임도 잘 맞았다. 별다른 의심 없이 보고 있었는데 댓글을 읽다가 실제 사람이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로 처음 보는 영상을 대하는 습관이 조금 달라졌다. 내용보다 입 모양이나 손가락을 먼저 보고, 이상하다 싶으면 출처부터 찾아본다.
한때 사진과 영상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그 증거부터 확인해야 한다. 2026년에는 이런 태도를 유난스럽다고 하기도 어렵다. 올해 1월 22일 시행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한 제품이나 서비스의 결과물이 AI로 생성됐다는 사실을 이용자가 알 수 있도록 표시하게 하고 있다.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가상의 음향·이미지·영상에는 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식의 고지나 표시를 요구한다. 법이 이런 표시까지 요구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영상에는 좀처럼 마음을 내주지 않으면서 영화관에서는 돈을 내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을 두 시간씩 바라본다. 소설을 읽다가 한 번도 태어난 적 없는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하기도 한다. 둘 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데 왜 하나는 의심하고, 다른 하나에는 기꺼이 빠져드는 걸까.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관은 조금 이상한 장소다. 불이 꺼지고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보는 것이 만들어진 세계라는 사실을 모두 안다. 화면 속 사람이 죽어도 배우가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두 인물을 보면서 현실에서도 연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운다. 악역에게 화가 나고 다음 장면이 궁금해진다. 어떤 인물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며칠씩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 허구를 단순히 '잘 만든 거짓말'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빠져 있다.
같은 '가짜'라는 말로 부르더라도 소설 속 살인과 실제 사건처럼 꾸민 영상은 그래서 다르다. 하지만 그 경계가 언제나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가 남긴 <은애전>에는 기묘한 사건 하나가 기록돼 있다. 종로의 담배 가게에서 소설 읽는 것을 듣던 한 남자가 이야기 속 영웅이 크게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자 흥분해 담배 써는 칼로 책 읽어주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내용이다.
수백 년 전의 기이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다가 요즘 모습을 떠올려보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드라마 속 악역을 연기했다는 이유로 배우의 SNS에 찾아가 욕설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작품 속 연애 관계를 배우들의 실제 관계처럼 받아들여 상대 배우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의 사건과 오늘날 SNS에서 벌어지는 일을 같은 심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야기 안에서 생겨난 감정이 이야기 밖의 사람에게 옮겨간다는 점은 닮아 있다.
〈너스 베티〉를 보며 웃지 못했던 이유
2000년 닐 라뷰트 감독의 영화 〈너스 베티〉는 이 경계를 조금 더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작은 마을 식당에서 일하는 베티는 TV 연속극을 좋아한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자신을 드라마 속 인물로 여기기 시작하고, 연속극에 등장하는 의사 데이비드를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 그를 찾아 길을 떠난다. 촬영 현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자신이 믿어온 세계와 현실 사이의 틈이 드러난다.
영화는 블랙코미디지만 처음 봤을 때는 좀처럼 웃기지 않았다. 한 발 떨어져 보면 황당한 상황인데 베티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과 그 이야기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때부터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좋은 영화나 소설을 두고 현실을 잊을 만큼 빠져들었다고 칭찬한다. 물론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필요하다. 극장의 불이 켜진 뒤에도 슬픔이나 분노는 남을 수 있다. 어떤 인물은 며칠 동안 마음에 걸리고, 오래전에 읽은 소설의 한 장면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도 배우와 인물은 다시 나뉜다. 책을 덮고 나면 이야기 속 사건과 눈앞의 현실도 제자리로 돌아간다. 허구를 즐기는 데에는 들어가는 능력뿐 아니라 돌아오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 짧은 영상을 보다 보면 이 오래된 규칙이 다른 방향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관에는 불이 꺼지는 순간이 있다. 소설에는 표지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이제부터 만들어진 세계를 보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SNS에는 그런 입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친구의 사진 다음에 뉴스처럼 생긴 영상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실제 사람과 거의 구분하기 어려운 인물이 말 한다.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과 생성된 장면이 같은 화면을 따라 흐른다. 표시나 출처가 없다면 어느 쪽인지 판단하는 일은 보는 사람에게 넘어온다. 예전에는 사람이 이야기에 너무 깊이 들어가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제는 현실의 얼굴을 한 이야기가 먼저 일상으로 들어온다.
'진짜 같다'는 말이 달라졌다
한때 '진짜 같다'는 말은 거의 칭찬이었다. 영화의 세트가 진짜 같고, 배우의 연기가 실제 인물 같고, 컴퓨터그래픽이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다고 감탄했다. 재현 기술이 좋아질수록 현실과 닮았다는 사실 자체가 성취였다. 이제는 진짜 같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놓기 어렵다. 눈앞의 장면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와 그 장면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가 됐다. 그렇다고 AI로 만든 것을 모두 의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AI로 만든 영화나 이미지도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본다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사람이 그린 용도 존재하지 않고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우주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만으로 허구와 거짓을 나눌 수는 없다. 영화라고 알고 보는 장면과 실제 뉴스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장면은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영화에서는 마음껏 빠져들어도 되지만 현실의 주장 앞에서는 사실인지 확인해야 한다.
요즘도 짧은 영상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내용보다 출처를 먼저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조금 피곤하다. 무엇을 볼 때마다 진짜인지부터 의심해야 하는 생활이 반가울 리 없다. 그래도 모든 만들어진 것을 의심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가는 좋아하는 영화와 소설도 함께 버려야 한다. 존재한 적 없는 사람 때문에 울고, 일어난 적 없는 사건을 며칠씩 생각하는 그 이상한 즐거움까지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출처를 확인하고 다시 화면을 넘긴다. 어떤 이야기 앞에서는 마음 놓고 속아주기 위해서, 어떤 이야기 앞에서는 끝까지 속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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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스토리에 '달빛바람'이라는 필명으로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작은 돌팔매질과 큰 끄덕임을 위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