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넌 어떻게 살아왔냐"... 인생 점검하게 만든 <들쥐>의 질문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가 직장생활 20년 차 가장에게 던진 '진짜 삶'의 의미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손톱을 먹은 쥐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 진짜 주인을 집에서 쫓아낸다는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를 재미있게 봤다. 작품 속 주인공 제문재(류준열)는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은 얼굴과 이름을 한 들쥐에게 삶을 통째로 도둑맞았다. 은행 계좌 속 돈과 집, 신분증은 물론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빼앗긴다.

처음에는 억울하게 삶을 빼앗긴 제문재에게 몰입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믿었던 진짜의 실체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유명 작가로 성공한 제문재의 삶 역시 타인의 글과 인생을 훔쳐 쌓아 올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삶을 빼앗긴 피해자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가해자였던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제문재는 빼앗겼던 이름과 신분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는데도 정작 그 이름으로 살아갈 자신을 찾지 못한다. 결국 드라마는 그가 자신의 진짜 삶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드라마 결말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진짜 나'라는 존재는 누구일까.

역할을 걷어내면 '진짜' 내가 남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에서 제문재의 이름과 삶을 빼앗은 '가짜 제문재'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에서 제문재의 이름과 삶을 빼앗은 '가짜 제문재'넷플릭스

직장 생활을 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사원으로 입사해 대리와 과장, 차장을 거쳐 지금은 부장급 관리자로 일한다. 회사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팀장'이라고 불린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에게는 '오빠'가 되고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된다.

가끔 궁금해진다. 이 가운데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일까. 어떤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까. 팀장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 세 가지 역할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비로소 '진짜 나'가 남을까.

그동안은 회사에서 퇴근해 글을 쓸 때, 복싱장에서 땀을 흘릴 때, 오래된 친구들과 만나 이름을 부르며 웃을 때 비로소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직장과 가정에서 맡은 역할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입는 옷이고, 그것을 벗어 던졌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 진짜 나라고 여겼다.

최근 <들쥐>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팀장인 나는 가짜일까.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아침마다 출근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닌가. 후배의 고민을 듣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나, 아이들 일을 걱정하는 나,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나는 사회와 가족이 요구해서 만들어낸 가짜 모습일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모습 역시 내가 살아온 흔적이니까.

무엇이 나를 '진짜'로 만들어 줄까

 금전 문제로 얽힌 노자(설경구)와 제문재(류준열)가 함께 가짜 '제문재'의 정체를 추적한다.
금전 문제로 얽힌 노자(설경구)와 제문재(류준열)가 함께 가짜 '제문재'의 정체를 추적한다.넷플릭스

<들쥐>의 제문재에게 부족했던 것은 신분을 증명할 서류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온전한 삶의 흔적이었다. 겉으로는 분명 제문재의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그 삶의 중요한 부분은 정작 진정한 자신이 아니었다. 드라마 속 노자(설경구)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다.

"다른 사람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너를 증명해 주는 거야. 네가 너임을 증명하려면 여태 네가 살아온 흔적으로 다른 사람이 네가 너임을 증명해 줘야 하는 거라고. 대체 넌 어떻게 살아온 거냐!"

처음에는 신분을 빼앗긴 제문재에게 현실적인 해결책을 알려주는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노자의 이 한마디가 <들쥐>에서 말하는 핵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 사람을 증명하는 것은 이름이나 신분증만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닐까. 회사에서 함께 일해온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지난 20여 년의 나를 기억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자라는 동안 내가 어떤 아빠였는지 기억한다. 아내에게는 함께 가정을 꾸려온 남편이고, 오래된 친구들은 아무런 잣대 없이 이름만으로 인연을 맺은 관계다.

'팀장', '남편', '아빠'라는 역할은 진짜 나를 가리는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진짜 나는 그 역할들을 모두 벗겨낸 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역할을 살아온 시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하루하루 쌓이는 '진짜' 나의 삶

 직장과 가정에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글쓰기와 운동 등 다양한 경험이 모여 '진짜 나'를 만든다.
직장과 가정에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글쓰기와 운동 등 다양한 경험이 모여 '진짜 나'를 만든다.AI 생성 이미지

내일 아침이면 다시 회사에 간다. 사람들은 나를 '팀장'이라고 부를 것이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아빠'라고 부를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내 이름을 내걸 것이고, 복싱장에서도 땀을 흘리며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제문재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지만, 온전한 자신의 삶을 되찾지는 못했다. 타인의 것을 빌려 쌓아 올린 삶에서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난 쉰 해 동안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고, 사랑하고, 일하고, 실패하고, 즐기며 남긴 흔적들이 있다. 그리고 내일도 그 위에 새로운 흔적을 새길 것이다.

이 쉽고도 당연한 사실, 내가 이렇게 소중한 순간순간을 살아왔다는 현실을 드라마 <들쥐> 덕에 반추하게 됐다. 결국 '진짜 나'는 찾아내야 할 어떤 본질이 아니라,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내가 하루하루 쌓아 올리는 삶의 결과물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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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직장인,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아빠, 매 순간을 글로 즐기는 기록자. 글 속에 나를 담아 내면을 가꾸는 어쩌다 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