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달리 비치는 환희의 얼굴, 이 영화도 그렇기를

[김성호의 씨네만세 1427] <환희의 얼굴>

영화를 보는 데 단 하나의 기준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다각도의 비평, 이해, 감상이 가능하다. 세상엔 마치 일타강사처럼 '이것이 정답이니 내 해석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평자들이 적지 않지만, 평론이 이룰 수 있는 진짜 미덕이란 그저 내가 찾은 어느 가능성을 남에게 내보이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한다.

물론 어떤 작품엔 정답과 가까운 해석이 존재한다. 창작자의 의도가 가장 매력을 틔우는 순간은 그를 읽어내는 수용자의 감상이 있을 때가 아닌가. 종자기가 있어 백아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종자기가 죽은 뒤 백아가 현을 끊은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어디 이것만이 답일까. 어떤 예술은 오해와 오독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나기도 한다.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대목에서 수용자가 감동하였다면, 그건 잘못된 것일까. 예술의 오랜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어떤 영화는 관객의 이해나 감동, 또 재미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지기도 하는 때문이겠다.

어떤 영화는 서사를 중시한다. 또 다른 영화는 서사를 완전히 신경 쓰지 않는다. 영상, 음향, 혹은 매체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온갖 수단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선형적으로 이야기를 밀고 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비틀고 왜곡하여 비선형적 감각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대중, 또 개별적 수용자에게 쉽고 친근하게 다가서려는 영화가 있고, 불편을 자아내서라도 의식을 깨우려는 작품도 있다. 그리고 아예 수용자를 무시하고 창작 그 자체에 전념하는 예술 창작자 또한 없지 않다. 말하자면 예술, 영화가 어떠해야 한다고 누구도 확언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 어떤 기준도, 평가도, 감상도 뒤바뀔 수 있다. 저마다의 기준점을 다른 곳에 빼어다 박는다면 말이다.

환희의 얼굴 스틸컷
▲환희의 얼굴스틸컷마름모필름

실패한 비평에도 유효함이 있다면

이제한 감독의 신작 <환희의 얼굴>을 평하기에 앞서 영화예술과 그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담론을 풀어놓은 것은 한 명의 평자로서 이 영화를 읽는 데 실패한 때문이다. 호평이든 악평이든, 정보를 풀어내든 해석과 감상을 중심으로 하든, 이제껏 이토록 읽는 데 실패한 작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을 고심하여 들여다보고도 유효한 글편을 써낼 수가 있을까 의심하게 되는 영화가 많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비평이란 때로 작품을 읽어내는 데 실패하여도 얼마든지 유효할 수 있다. 그건 비평이 또 다른 예술이자 창작의 영역인 때문이요, 창작자의 실패가 도리어 수용자에게 유효한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까닭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써 나는 온라인 매체에 실리는 대중 대상 비평이란 제한적 글 안에서 통상의 비평가가 꺼리는 일, 말하자면 스스로의 해석과 이해가 실패했음을 드러낸다거나 졸작에 대한 악평을 쓰는 일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와 비평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환희의 얼굴>로부터 실패의 유효함을 길어낼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실패란 도전적 헤맴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유효해지는 것인데, 어느 한 방향으로도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한 사고의 가지를 두고서 헤맸다고 할 수 있을지를 의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희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은, 이것이 한 명 필자로서 독자와의 약속인 때문이다.

환희의 얼굴 스틸컷
▲환희의 얼굴스틸컷마름모필름

네 편의 연작소설처럼

<환희의 얼굴>은 어떤 영화인가. 크게 네 개 덩어리로 나뉜 이야기는 모두 제 나름으로 환희의 얼굴을 보여준다. 배우 정이주가 연기한 환희는 각 장에서 저마다 다른 때, 다른 방식으로 인물들과 마주한다. 때로는 선생님이라 부르는 작가와, 또 때로는 제가 일하는 음식점 주인이며 동료 아르바이트생과 만나 이런 저런 일을 겪는다. '소설가의 집', '방문자들', '꿈과 희망의 나라로', '환희의 얼굴'이라 각기 이름 붙은 네 장은 노골적으로 단편소설집, 그중에서도 주인공이 같은 연작소설의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 영화가 선명하게 서사적 인과를 드러내며 전개되거나 통상의 성장담을 기대하게 하는 구석이 없다는 점이겠다.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낯선 톤의 대화는 마치 홍상수 영화의 그것처럼 보이는데,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자면 그 연관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대화와 구성, 관객에게 다가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감독이 그저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해서인지, 적극적으로 참조하려 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이미 거장이라 불리는 다른 감독의 인장이라 해도 좋을 흔적들이 묻어나는 건, 차별화할 성취가 없다는 전제 아래 그리 바람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환희가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진득하게 보인다. 때로는 주인공이 환희인 듯 하지만, 그보다 많은 경우 환희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처럼도 느껴진다. 같은 인물이 다른 장에 등장할 때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영화는 확신할 수 없도록 충분한 단서를 배치하지 않는다. 각 상황은 관련성이 있는 듯, 없는 듯 제각기 이어진다. 처음 환희는 자기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를 찾아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다음엔 그녀의 집 앞에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 사이 가까운 듯 실은 가깝지 않은 관계성이 드러나고, 둘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결과가 확인된다. 그러나 환희의 말과 그녀를 대하는 타인의 말 사이에서 관객이 믿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는 끝내 알 수 없는 일이다.

환희의 얼굴 스틸컷
▲환희의 얼굴스틸컷마름모필름

나의 오독을 오독오독 씹어가며

상황도 인물도 바뀌지만 다르지 않은 상황들의 연속이다. 환희가 먼저 일했다는 백반집과 옮겨 일하려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일도 그렇다. 환희는 좋은 아이인가, 나쁜 아이인가.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를 판단하게 유혹하지도, 거리를 두게끔 강제하지도 않은 채 모호한 관점을 유지한다. 마치 청자가 없이 혼잣말 하는 사람처럼 제 갈 길을 간다. 보는 이는 자연히 떨어진 이야기의 간극을 메우려 수고하려 들 테지만, 그것이 답에 가까이 가는 길인지 그 반대인지, 심지어는 그 수고가 작품의 의도와 엮여 있는지 아닌지도 상관하려 들지 않는다.

많이 무리해서 말하자면 제목인 '환희의 얼굴'에서 연상할 수 있듯, 한 사람의 얼굴을 단일한 시점, 특정한 관계와 상황으로 단정하거나 평가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라 적을 수는 있겠다. 다만 영화가 그와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는 어떠한 증좌도 발견하지 못한 관계로, 나는 그렇다고 적기 민망해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 최대한 그럴 듯한 의미가 담긴 쪽으로 쓴다는 이름난 어떤 비평가와는 달리, 나는 말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평자의 욕구로 대단하게 부풀리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이 영화 앞에 나의 무력함을 인정할 뿐이다.

반대로 <환희의 얼굴>이 나쁜 영화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어찌 됐든 전개되고 인물들은 저마다 통제된 방식으로 맡은 이를 연기한다. 그 사이에서 관객의 관심은 영화의 해석이나 비평과는 무관하게 어느 것엔 끌리고 다른 것엔 멀어지며 저 나름의 길을 간다. 이미지와 음향 또한 그 자체로써 쾌하다거나 불쾌하다고 말할 수 없는 평이함의 연속으로, 관객 저마다의 개별적 이해와 감각이 주관적으로 뻗쳐나갈 환경을 제공한다. 요컨대 압도하거나 이끌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 않는다. 말은 하고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를 고려하지 않는 것, 관객으로서의 내 자리를 소설의 형식을 입은 영화 가운데 찾기 힘들단 건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영화 가운데 여러 순간에 걸쳐 환희는 제 자리를 찾으려 한다. 때로는 상대의 마음속에서, 또 때로는 일터 안팎에서 제가 있을 자리를 구한다. 사람이란 어디든 몸과 마음 둘 자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듯이. 그렇다면 이 영화 가운데 관객의 자리는 어디인가. 나의 오독을 오독오독 씹으며 내 자리를 찾다 실패한 한 명의 관객이 되어 감독을 바라본다. 극장이 제공한 좌석 번호 말고 진짜 영화가 염두에 둔 관객의 자리가 있긴 하였는지, 문득 나는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환희의 얼굴 포스터
▲환희의 얼굴포스터마름모필름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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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