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1일, 전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편도 4시간 남짓, 늘 도로 위에서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은 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깝기도 하다. 자가용을 이용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전해야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해도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는 아쉽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었고, 심지어 업무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몸에 병까지 생겨 건강에 변화를 겪다 보니 예전처럼 오랫동안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에 주로 음악을 듣는다. 흘려보내던 시간이 음악이 흐르는 순간, 다시 내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왕복 8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
출발하면서 최근 9주기를 맞은 가수 조동진의 음악을 다시 들었다. 얼마 전 들국화의 기타리스트 최구희의 부고를 접하며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여운 때문인지, 조동진의 음악에 이어 오랜만에 들국화의 앨범도 다시 꺼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주에서 부산까지, 다시 부산에서 전주까지 왕복 8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평소 병증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어지럼증마저 잠시 잊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동진이나 들국화를 누군가는 너무 잘 알고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잘 모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두 뮤지션을 빼놓을 수는 없다.
특히 조동진은 그룹 '어떤 날' 조동익의 친형이자 한국 포크 음악 1세대로,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로 불린 음악인이다. 1966년 미8군 무대를 통해 음악을 시작한 그는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에서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했고, 1979년 <행복한 사람>이 수록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이후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등을 통해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갔다. 들국화 역시 조동진과 동아기획에서 음악적 인연을 맺으며, 그가 만들어 놓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흐름과 영향을 받았다.
▲지난 1986년, 2집으로 함께 활동했던 밴드 들국화.들국화컴퍼니
들국화는 1983년 10월 전인권과 최성원, 허성욱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전인권의 허스키하며 폭발적인 보컬, 최성원의 천재적인 음악 감각, 허성욱의 섬세한 키보드 연주는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여기에 기타리스트 조덕환을 비롯해 최구희, 손진태, 들국화의 전성기를 이끈 드러머 주찬권 등 당대 최고의 음악인들이 함께하며 들국화라는 슈퍼밴드를 완성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9년 전 조동진은 세상을 떠났다. 들국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97년에는 허성욱이 캐나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2013년에는 드러머 주찬권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기타리스트 최구희마저 세상을 떠났다. 세월의 흐름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누구도 시간을 붙잡을 수 없고, 결국 사람들은 모두 떠난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들의 연주를 더 이상 직접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너무 허전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50대가 되어 다시 들은 공연 실황
나 역시 어느덧 나이를 먹어 갱년기 증상을 겪는 중년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부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였을까. 들국화의 앨범 가운데 <Live Concert> 실황 앨범을 음원 사이트를 통해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음반은 1986년 동아기획(서라벌레코드)을 통해 2장의 LP로 처음 세상에 나왔고, 1990년 CD 매체로 재발매된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이다. 가장 뜨거웠던 1980년대 들국화의 현장 사운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공연이 녹음될 당시인 1980년대 중반, 10살 차이 나던 사촌 형이 그렇게 좋다며 매일 듣던 들국화의 음악을 접했다. 하지만 어린 내게 들국화는 사뭇 대중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2년 뒤인 1988년 대학가요제에 나와 대상을 수상한 무한궤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솔로 앨범을 발표한 무한궤도의 보컬 신해철에게 한층 더 빠져들었다.
그러니 들국화의 라이브 앨범을 찾아 들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지드래곤 같은 아이돌 가수에 푹 빠져 있던 소년 시절이었다. 그때 놓쳤던 앨범을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50대 초반이 되어서야 CD 재발매 음원 형태로 다시 접하게 됐다. 감상평은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평하기에는 너무나 대단한 공연 실황이었다.
스튜디오 라이브 특유의 생생함 때문인지,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각각의 연주자가 가진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리였다. 어린 시절 스쿨밴드에서 보컬을 꿈꾸던 나는 그저 밴드의 중심은 보컬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노래를 잘하는지, 누가 매력이 있는지 보며 밴드를 판단했었다.
하지만 50대가 되어 다시 들은 들국화는 달랐다. 그들은 단순히 한 명의 보컬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밴드가 아니었다. 각각의 멤버가 자신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연주하고, 그 연주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다. 각자의 소리가 따로 존재하는데도 결국 하나의 음악으로 구현되는 것.
들국화의 기개와 자신감
거기에 건전가요마저 들국화풍으로 장르를 파괴해 버리는 그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건전가요'는 1979년 5월부터 1988년 11월 폐지될 때까지 국가 선전과 국민 계도를 이유로 모든 음반에 의무적으로 1곡 이상 넣어야 했던 강제 규정이었다. 앨범의 흐름이나 가수의 색깔과는 무관하게 주로 음반의 맨 마지막 트랙에 의무적으로 배치되곤 했다.
항상 가수들의 신보 앨범을 들으며 건전가요가 한 곡씩 들어 있는 것이 참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들국화는 그 방식을 정면으로 박살이라도 내듯 자신들의 색깔로 '들국화풍 건전가요'를 만들어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구니까!'
들국화풍의 동요까지 라이브 앨범에 담겨 나오자, 이 밴드는 시대의 구조에 반항하는 방법도 참 절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들어도 '들국화의 노래'인데, 결국 건전가요였다. 듣다가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묘한 존경심까지 들었다. 그들의 투지와 열정, 그리고 음악적 자신감이 마치 화산의 마그마처럼 분출되는 듯했다. 수백 명의 관객과 호흡하던 그 뜨거운 스튜디오의 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흘러 들어와 내 왕복 8시간의 여정을 화려한 콘서트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젊은 시절 전인권의 말솜씨였다. 영화 <록키>의 실베스터 스탤론처럼 어눌한 말투를 떠올렸던 평소의 이미지와는 달리, 무대 위 전인권은 전혀 달랐다. 정겹고 센스있는 그의 입담이 정말 좋았다. 노래뿐 아니라 관객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공연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K팝 이전에 그들이 있었다
최근 들국화의 라이브 앨범을 다시 듣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우리에게도 이런 대단한 밴드가 있었는데 왜 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을까?'
특히 들국화가 부른 'Come Sail Away'를 라이브로 들으며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이 곡은 미국 시카고 출신의 록 밴드 스틱스(Styx)가 1977년 발표한 7집 <The Grand Illusion>에 수록한 곡이다. 앨범은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6위까지 올랐고, 'Come Sail Away' 역시 싱글 차트 8위에 오르며 스틱스를 대표하는 곡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런데 전인권이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나는 잠시 원곡을 잊었다. 개인적으로는 '원곡보다 더 잘 부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인권이 영어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소화했나 싶었다. 마치 영어권 가수가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보컬이었다.
여기에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 드럼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놀라운 연주를 펼쳤다. 한 사람의 스타가 밴드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각 멤버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그게 바로 들국화였다.
조동진의 노래가 지금도 후배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리고 다양한 해석으로 리메이크 되어 사랑 받는 것을 보면, 좋은 음악은 장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바뀌어도 좋은 음악은 그렇게 살아남는다.
오늘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K팝을 보면서도 문득 들국화가 떠오른다. 어쩌면 들국화처럼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고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수많은 음악인이 있었기에 지금의 K팝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지금의 K팝이 세계 무대에서 거두고 있는 성과는 자랑스럽고 대단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는다. 우리에게는 K팝 이전에도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다양하고 훌륭한 장르의 음악과 음악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K팝 역시 한 장르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장르로 영역을 넓혀갔으면 한다. 그렇게 더 오래, 더 많은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한국 대중음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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