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양이를 놓아줘> 스틸컷
(주)안다미로
03.
그 계기는 아사코(무라카미 유키노 분)다. 모리는 우연히 카페에서 오래전 함께 친하게 지냈던 그를 만나 공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껴안게 되고, 영화는 과거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아직 모리가 결혼하기 전, 모리와 아사코, 치카가 어울리던 시절이다. 세 사람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치카가 결혼을 앞두게 되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머지 두 인물인 모리와 아사코 역시 두 사람만의 은밀한 관계를 만들어 간다. '모리'의 입장에서 받아들여지는 영원할 줄 알았던 시간의 유한성이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장면이 하나 있다. 모리와 아사코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전후로 두 번, 서로에게 다가가는 주체가 달라지는 부분이다. 하나의 장면(기억)에서는 아사코가 먼저 움직이고, 다른 장면(기억)에서는 모리가 먼저 행동한다. 현재 시점의 공원에서 있었던 포옹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아사코가 모리를 안는 것으로 표현되는 순간이 나중에 아사코의 시점으로 돌아가서는 모리가 아사코를 안는 장면으로 바뀐다. 같은 순간의 동일한 행동이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달라졌다.
영화가 말하는 기억의 왜곡은 거짓과는 거리가 멀다. 둘 가운데 어떤 기억이 옳은 것인지 알려주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양쪽 모두 자신의 현재에서 과거를 다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 사이의 간극에는 큰 감정적 거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영화가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은 과거를 보관하지 않는 일이 된다. 현재의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모양으로 지나온 과거를 계속 덧입혀 다시 쓰는 일만이 존재한다.
04.
"미안해. 너 말고는 이런 부탁할 사람이 없었어."
같은 맥락에서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끝내려는 치카는 모리와 아사코 다른 두 인물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며 이혼을 선택한다. '모리'가 시간의 유한성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치카'에게 같은 유한적 사건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이혼 신청서를 대신 작성하는 사람이 아사코라는 사실은 역시 같은 상황을 옮겨내기 위한 목적이 크다. 아사코 역시 자신의 삶에서는 오랫동안 멈춰있던 인물이다. 그림을 그려왔지만 이제는 그만둔 상태이고, 자신을 상처 입히는 방식으로밖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관계를 끝내기 위한 문서를 대신 적는다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그 사이에 몇 장면이 더 주어지지만, 결과적으로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오래 방치해둔 미완성된 그림 앞에서 다시 붓을 든다는 것. 이 또한 멈춰있던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임과 동시에,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지나온 과거를 덧입혀 다시 쓰는 일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영화 <고양이를 놓아줘> 스틸컷(주)안다미로
05.
"우리가 사라져서 동네 고양이들이 힘들었을 거야."
영화 초반부에서 마이코는 모리가 우울에 관해 쓴 가사 위에 '놓아버리자'라는 단어를 남긴다. 정황만 살피자면, 사진가로 성공해가고 있는 사람이 삶의 의욕을 잃은 이에게 남기는 가장 잔혹한 말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까지 나아간 뒤에 다시 돌아와 생각하자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마이코가 그에게 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음악, 관계, 현재가 아닌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감정, 그리고 그 방식임을 알 수 있게 되면서다.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던 아내의 전시장에서 모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이 타인이 바라본 이미지로 존재하는 광경을 마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진을 보며 그 안에 담긴 순간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한다. 이 시퀀스가 말하는 것은 영화가 이야기하는 모든 과거 장면 전체다. 여기에는 직접 제시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간도 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한순간은 사진으로 남겨둘 수도 있고, 그 장소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대화로 소환해 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당시에 느낀 감정까지는 재현해 감각할 수 없다는 것. 그 지점이 바로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06.
"그러니 괜찮을 거야. 조급해 하지 않아도."
이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처음에 등장했던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함. 그리고 사진전 시퀀스의 마지막에 놓이는 장면, 아내를 친근하게 부르는 어떤 남자와 먼저 전시장을 빠져나온 모리의 모습, 그리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뒤따라 나온 아내 마이코의 행동이 주는 어색함까지. 하지만 두 사람은 별다른 사과나 화해의 제스처 없이 그저 따라 걸을 뿐이며, 카메라도 그 모습을 롱테이크로 뒤따른다.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은 채로 그저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것이다.
기억을 지워낸 삶,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시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와 있었던 갈등을 없었던 일로 한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아사코, 치카와 함께 했던 기억을 잊는다고 그 순간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 모리는 다시 소리와 음악을 만들고, 아사코도 그림 앞에서 붓을 든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끝없이 되뇌는 일 대신,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제멋대로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기억에 매몰되었다가 마침내 제 갈 길을 향해 떠나보내 주는 일. 그 과정에 놓인 한 사람의 시간을 지켜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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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