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세고 더 많고 빠른 자극만... 가이리치 그렇고 그런 선수됐나

[김성호의 씨네만세 1424] <인 더 그레이>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작 <인 더 그레이>는 가이 리치의 오락영화다.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범죄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섬에서 사실상의 영주나 다름없는 부호의 손아귀에서 여성 변호사를 무사히 탈출시키는 게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주인공 레이철(에이사 곤잘레스 분)은 금융가 뒷거래를 제 영역으로 하는 솜씨 좋은 변호사다.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미국 금융가에선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도무지 상환받을 수 없는 악질적인 채무가 적잖다. 실제로는 지급 능력이 있음에도 돈세탁, 가짜 파산 같은 방식으로 갚지 않는 실력자가 있다면 그를 어찌해야 할까. 바로 그때 고용되는 선수가 있으니, 바로 레이철 같은 승부사들이다.

인 더 그레이 스틸컷
▲인 더 그레이스틸컷스튜디오 초이스

금융계 이면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공작

영화는 금융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프닝으로 걸음을 뗀다. 서류 하나를 두고 살인청부사 냄새를 잔뜩 풍기는 이들이 살 떨리는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결국 솜씨 좋은 쪽이 승리를 거두는데, 알고 보니 그는 악질채무자인 매니 살라사르(카를로스 바르뎀 분) 수하에서 더러운 일을 처리하고 다니는 자다.

마피아 조직의 살해 현장을 연상케 하는 장면 뒤로 뉴욕의 화려한 도시 전경이 이어진다. 월가에서도 대단히 큰 기업, 그중에서도 커다란 사무실을 쓰는 보비(로자먼드 파이크 분)는 앞선 현장에서 살해당한 이들의 고용인이다. 큰돈을 만지는 거대 투자은행 간부인 그녀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제게 일을 맡기라고 요구하니, 그가 바로 레이철이다. 레이철은 보비가 고용해 보낸 이들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갖춘 선수인데, 영화는 바로 그녀의 활약을 다룬다.

젊고 가녀린 여성 변호사 레이철이 사나운 사내들도 해내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가 있을까. 그 비결은 그녀가 거느린 수하들에게 있다. 시드(헨리 카빌 분)와 브롱코(제이크 질렌할 분)가 바로 그들로, 특수부대 출신인 두 사내가 각기 이끈 전문가팀은 온갖 비밀공작부터 폭발물 설치, 첩보와 전투에 이르기까지 못 하는 게 없는 대단한 실력자들로 구성돼 있다. CIA 같은 정보기관 뺨따귀를 돌리는 이 놀라운 팀들을 통해 레이철은 매니 살라사르가 가진 힘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사지를 하나씩 잘라내 간다. 목표는 10억 달러에 이르는 채무를 모두 상환 받는 것. 그중 상당한 부분이 레이철의 몫이 된다.

채무액만 10억 달러, 한화로 1조3000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매니 살라사르가 보통 사업가일 수는 없다. 수많은 사업체와 자산을 법망이 지켜보는 밝은 곳과 그물에 걸리지 않는 어두운 곳에 분산해 놓은 그는 스페인 한 섬을 자신의 왕국처럼 만들어 두고는 은신해 살아간다. 그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선 퇴로가 없는 구석으로 그를 몰아두고 면대면으로 만나 결정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오프닝에 등장한 이들처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10억 달러 받아내기'가 '섬에 들어간 레이철 구하기'가 되는 건 그래서다.

인 더 그레이 스틸컷
▲인 더 그레이스틸컷스튜디오 초이스

1조 원 받아주는 미모의 여성 변호사

영화는 여러모로 통상적인 범죄물의 외연을 갖췄다. 빼돌리는 게 사람일 뿐, 섬의 치안을 책임지는 이들과 매니 살라사르의 추적을 뚫고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은행 터는 영화와 얼마 다르지 않다. 드론으로 주변을 살피고, 폭약으로 벽을 뚫고, 해킹으로 정보를 빼내며, 기교 넘치는 운전으로 추격을 따돌리는 등 이런 류의 영화에서 흔히 마주하는 장면들도 여지없이 구현된다. 전직 특수요원답게 피 튀기는 총격전도 물론 있다. 그러니까 어디서나 수없이 마주했던 그렇고 그런 것을 이 영화에서 보게 된다.

문득 나홍진의 <호프>가 떠올랐다. 보다 정확히는 작품 가운데 유달리 많이 반복되던 대사 하나다. 작은 항구마을 호포에서 괴수와 맞서려는 주민들이 군에서나 구할 수 있는 화기와 탄약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 때, 그 출처를 묻는 주인공에게 주변 인물들은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이를 반복해 듣고 있자면 그저 극중 인물이 주인공에게 하는 말처럼만 느껴지지 않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비현실적 전개 앞에 멈추어 서서 개연성, 또 핍진성을 따지려는 관객들에게 감독이 윽박지르는 듯한 모습이 비치는 것이다. 지나친 상상일까.

미스터리와 괴수물, 카체이싱과 활극, 나아가 SF로까지 이어지는 장르의 전환을 마주하며 <호프>란 어쩌면 영화를 위한 영화, 자극의 극치를 향해가는 오락물을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 적잖은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오로지 더 세고 많고 빠른 자극에만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오락과 거의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자극이 전부일 뿐, 그 이상 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듯한 영화가 한 해에도 수백 편씩 쏟아지는 게 이 시대 영화란 매체의 현실인 듯하다(관련기사: 윽박지르듯 질주하는 '호프', 나홍진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https://omn.kr/2iz5w).

인 더 그레이 스틸컷
▲인 더 그레이스틸컷스튜디오 초이스

화제 몰고 다니는 스타 감독의 신작

아마도 가이 리치는 이 같은 경향의 최전선에 있는 감독일 테다. 한때는 영국 영화의 새 경향을 열 기대주로 주목받았고, 팝스타 마돈나와 결혼해 세계적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주 활동무대를 할리우드로 옮긴 뒤로는 그야말로 망작과 상당한 연출적 기량이 엿보이는 작품들을 번갈아 내놓으며 영화팬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한 대단한 감독이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로 출발해 <리볼버>를 거쳐 <셜록 홈즈> 시리즈와 <알라딘> 등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는 상당히 넓은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적 스타일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감독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그 사이 자리한 수많은 졸작들, 이를테면 <스웹트 어웨이>부터 <맨 프롬 엉클> <킹 아서: 제왕의 검>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을 보자면 저만의 스타일을 진작하고 더 나아지려 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특히 최근 들어서 그의 다작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한 해 수 편씩 쏟아지는 판에 박힌 장르물은 그 작품을 유통하는 OTT 서비스의 특성과 맞물려 영화를 이전보다도 가볍고 별 볼 일 없는 매체로 여기게끔 한다.

인 더 그레이 포스터
▲인 더 그레이포스터스튜디오 초이스

뭣이 중헌디?

신작 <인 더 그레이>가 꼭 그와 같은 작품이다. 금융계에 영화와 같이 채권회수를 위한 청부업자들의 존재가 실재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레이철이란 젊은 여자 변호사가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현장 특수요원들을 어떻게 부릴 수 있는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헨리 카빌과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매력적이고 솜씨 좋은 이들이 어째서 그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들과 이들이 거느린 팀이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 해도 매니 살라사르가 군림하는 섬에서 어떻게 수많은 이들을 제압하고 작전을 성공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 전투력의 비현실성 또한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밖에 좀처럼 믿기지 않는 많은 것들이 별 어려움 없이 이뤄지는 상황 또한 그렇다.

<인 더 그레이>는 그저 내달리는 영화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반복적으로 자극을 주입한다. 그저 이것으로 충분치 않느냐고 말한다. 한때는 전에 없던 템포로써 자유자재로 공을 다루며 다가들던 브라질인 드리블러 같았던 가이 리치다.

그러나 그는 어느덧 패턴화된 드리블만 반복하며 이 정도면 평균은 넘지 않느냐고 외곽을 맴도는 그렇고 그런 선수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가이 리치의 이름을 더는 외울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인 더 그레이>가 제작비 이상을 회수하는 안전자산이 될 수는 있겠으나, 실망을 감출 수 없는 것은 가이 리치와 제이크 질렌할의 이름에서 기대한 바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일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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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