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백수광부 〈다 내 아이들〉 공연 장면
극단백수광부제공ⓒ윤헌태
내 가족'에서 '다 내 아이들'로 넓어지는 책임
이 지점에서 <다 내 아이들>은 단순한 가족 비극을 넘어선다. 아버지가 믿는 것은 '내 가족을 위한 책임'이고 아들이 믿는 것은 '타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책임'이다. 가족을 지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조의 신념과 "아버진 사람들하고 같이 안 살아요?"라는 크리스의 절규가 맞부딪칠 때, 무대 위 가족의 다툼은 곧 사회의 윤리에 대한 논쟁이 된다. 누가 더 가족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책임져야 할 '우리'의 범위를 어디까지 그을 것인가가 문제다.
제목을 원작의 <All My Sons>에서 '모두가 나의 아들'이 아니라 <다 내 아이들>로 옮긴 선택도 흥미롭다. '아들들'을 '아이들'로 바꾸면서 전쟁에서 죽은 21명의 군인은 특정한 시대의 병사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이로 다가온다. 래리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서야 조는 자신에게 크리스와 래리만이 아들이었던 반면, 래리에게는 죽어간 젊은이들 모두가 같은 공동체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다 내 아이들이 맞는 것 같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제목이 곧 작품의 윤리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이성열 연출이 핼러윈을 작품 속 시간으로 끌어들인 것도 이러한 '아이들의 죽음'을 오늘의 기억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다. 실제 관람기에는 이태원과 맹골수도를 직접 환기하는 장치가 등장한다고 기록돼 있다. 죽은 자가 돌아오는 핼러윈, 실종된 래리를 기다리는 어머니, 책임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채 남겨진 죽음이 한 무대 위에서 겹친다. 그렇기에 1947년의 미국 이야기가 2026년 서울의 객석에서 의외로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바로 이 현재화가 이 공연의 강점인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대목이다. 서울문화재단의 초연 비평은 사회적 참사를 강하게 환기할수록 원작을 떠받치는 핵심 조건인 '전쟁'이 약화될 위험을 지적했다. 조는 단순히 안전을 무시한 기업인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한 수혜자다. 이 조건이 흐려지면 조는 우리가 너무 쉽게 심판할 수 있는 악인이 되고, 전쟁과 자본, 평범한 시민들의 안락함까지 함께 묻는 아서 밀러의 더 불편한 질문은 오히려 희석될 수 있다.
이 비판은 공연의 현재성을 부정한다기보다 오히려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전쟁'은 무엇인가. 기업을 살리기 위해 안전을 미루는 관행, 조직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덮는 선택, 내 편과 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위험을 외면하는 일은 조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80년 된 고전이 지금 살아 있으려면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참사와 일대일로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 켈러를 만들어내는 오늘의 구조가 무엇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극단 백수광부의 <다 내 아이들>은 화려한 재해석보다 배우와 텍스트의 힘으로 승부한다. 사건의 진실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가는 아서 밀러의 극작술, 그것을 서두르지 않고 밀어가는 이성열의 연출, 박완규와 길해연을 중심으로 권다솔·박희정 등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130분을 채운다. 서울예술상 심사위원들이 '정통 사실주의 연극의 힘'이라고 표현한 것이 결국 이 공연의 가장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새롭다는 이유로 고전을 해체하는 대신, 잘 쓰인 희곡과 잘 훈련된 배우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극단 백수광부 〈다 내 아이들〉 공연 장면극단백수광부제공ⓒ윤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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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