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이 떠난 자리, 아이들은 다시 모래판에 섰다

[넘버링 무비 554]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으랏차차! 씨름소년단>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으랏차차! 씨름소년단> 스틸컷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으랏차차! 씨름소년단> 스틸컷EBS 국제다큐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성장에 대한 서사를 만들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결국 해낼 수 있게 되고, 패배의 그늘에 머무르고 있던 존재가 승리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될 때 관객은 성장의 메타포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스포츠가 성장 이야기와 자주 결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변화를 가장 눈에 띄게 보여줄 수 있는 소재다. 빈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으랏차차! 씨름소년단>에도 비슷한 궤적이 존재한다. 경남 창원 교방초등학교 씨름부 아이들은 전국을 제패했던 선배들이 졸업을 앞두며, 자신들이 팀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다큐멘터리는 2025년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약 6개월의 기록을 담았다.

02.
"창단 역사상 최고의 해죠, 올해 2025년도는요. 역사상 최고의 해였고 최고로 잘했고."

교방초등학교 씨름부는 김현근 감독이 처음 부임했던 2018년까지만 해도 부원이 단 한 명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봐야 했을 정도. 과거와 달리 씨름 종목에 대한 인기가 많이 떨어진 이유도 있지만, 학생들이 처음부터 상의를 탈의하는 일에 많은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숙제였다고 한다. 이에 감독은 가장 먼저 아이들이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스스로가 편해질 때까지 상의를 입고 씨름을 접하도록 하고, 일반 학생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교내 리그전과 같은 행사도 열었던 것이다.

그 결과, 2025년 교방초 씨름부는 한 해에만 우승 3번, 준우승 3번을 포함해 모든 대회 개인전까지 1위를 휩쓸며 어떤 대회에서도 메달 없이 돌아온 일이 없을 정도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교내에서도 그만큼 인기를 얻으며 25명이나 되는 부원을 모집할 수 있게 되는데, 어디 가서 씨름부가 이만한 인원을 데리고 훈련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03.
문제는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두며 씨름부를 강팀으로 성장시킨 주력 6학년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껏 그들의 뒤만 따르면 되던 4학년, 5학년 아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씨름부를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전 세대가 거둔 성적과 영광의 크기만큼 다음 세대가 감내해야 할 부담감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 설정으로 인해 다큐멘터리는 기존의 다른 스포츠 영웅 서사의 흐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하나의 천재적인 선수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이 다음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 가는 것인가 하는 쪽으로 흐를 수 있게 된 셈이다.

실제로 영화는 세 번의 대회 장면을 조명하는데, 여기에는 모두 단체전의 모습이 놓인다. 한 명의 선수가 아닌 하나의 집단. 서로의 순서와 역할을 익히고, 누군가 진 다음에도 경기가 끝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 그 바통을 이어 계속해서 나아가는 힘을 각자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 말이다. 선배들의 빈자리는 그들처럼 똑같이 행동하고 배운다고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 작품은 다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의 목표를 나누며, 그 과정에서 각자의 책임감을 조금씩 나눠 가지며 팀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으랏차차! 씨름소년단> 스틸컷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으랏차차! 씨름소년단> 스틸컷EBS 국제다큐영화제

04.
"지금 져도 돼. 계속 져. 지면 어때? 그런데 뒤에는 너희 분명 이길 거야."

물론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6학년 선배들이 졸업하고, 이듬해 출전한 첫 단체전인 '제56회 회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아이들은 예선 탈락을 경험한다. 이전까지 어떤 대회도 지지 않던 강팀의 일원이었다는 자부심과 이제 자신들이 그 팀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이끌어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충돌이 처음 일어나는 순간이다. 아이들은 그 냉혹한 사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김현근 감독은 그런 아이들을 앞으로도 많이 질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모래판 위로 돌아간다.

이 지점이 다큐멘터리 <으랏차차! 씨름소년단>이 포착하고자 하는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패를 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회복력이다. 단 한 번의 실패도 허용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우리 어른들은 한 번의 실패를 오래 기억한다. 이유를 붙이고,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때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의 일까지 유추해 스스로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낯선 패배의 경험 앞에서 잠시 슬퍼할지언정 금방 다시 일어선다. 실패를 충분히 아파하면서도 영원한 사건으로 만들지 않는 능력이다. 넘어졌다는 사실과 다시 모래판 위에서 내일을 준비하는 일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이 사이에서 성장이 도모된다.

05.
물론 그 곁에는 김현근 감독의 존재가 있다. 그는 조력자이자 보호자로서 아이들의 시간을 곁에서 지지하며 기다려준다. 당장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넘어지고 슬퍼하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아이들이 다그치며 성장하도록 만드는 주체가 아닌 그 과정을 만들어 주는 어른. 이 작품으로 보자면, 아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모래판을 지키고, 실패해도 불구하고 다음 경기에 나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일이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교방초 씨름부는 '제80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한다. 직전 대회였던 회장기 대회에서 예선 탈락했던 것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는 경기와 이기는 경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씨름부는 자신들만의 서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2025년도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다시 재현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06.
"연습할 때 지는 건 지는 게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라고"

김현근 감독은 패배를 피해 성장하는 길이 씨름에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보다 실력이 조금 더 강한 상대에게 연습에서 끊임없이 져보는 경험만이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만큼 넘어져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가 씨름을 소재로 정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은유처럼도 보인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힘만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균형을 배워가기 때문이다. 넘어진 다음에도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성장했고, 또 성장해 갈 것이다.
다큐멘터리 EBS국제다큐영화제 으랏차차씨름소년단 교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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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