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포청천을 그리워하는가

[김성호의 씨네만세 1439] CTS <1993 판관 포청천>

간만에 본가에 들러 TV리모컨으로 채널을 훑어 내렸다. 스포츠와 증권, 예능과 뉴스, 홈쇼핑을 지나 만난 어느 채널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익숙한 목소리와 마주했다. 송나라 개봉부 판관 포증, 포청천이 법정에 꿇어앉은 죄인을 내려보며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었다.

"개작두를 대령하라~!"

<판관 포청천> 시리즈는 이제는 고전이 된 중화권 명작 드라마다. 소위 '중드'라 불리는 중국 및 대만 방송국 제작 드라마 가운데 역대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소설 <칠협오의> 속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사실상의 2차 창작물 격인데, 드라마의 대성공 덕분에 원작을 넘어서는 인기를 구가했다. 1974년 작 <포청천>부터 2019년 제작된 <포청천 재기풍운>까지, 여러 방송국이 저마다 제작한 시리즈만 20편을 훌쩍 넘는다. <칠협오의>보다도 파생된 <포청천>에 충실한 작품만 헤아려도 십 수 편이 족히 된다.

1993 판관 포청천 스틸컷
▲1993 판관 포청천스틸컷CTS

15편만 만들려 했는데 236편이 되었네

한국에서 유명한 건 역시 <1993 판관 포청천>이다. 모두 41개의 이야기, 총 236부작으로, 대만 CTS 방영 당시 15부작 미니시리즈였던 것이 시청률 폭증과 맞물려 전설적인 대하드라마로 거듭났다. 1993년 방송 직후 워낙 화제가 된 탓에 홍콩 지상파 TVB와 aTV가 앞다퉈 판권을 구매해서 동시간대 동시 방영이란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건 세계 방송 역사에 길이 남는 장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중화권을 휩쓴 이 드라마는 한국서도 비디오를 통해 곧장 유통돼 선풍적 인기를 구가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한국 방송사들도 이를 탐냈는데, MBC가 추석특집으로 두 편만 떼어다가 방영한 것을 KBS가 전편 계약에 성공해 이듬해인 1994년부터 2년 넘게 정규방송으로 편성됐다. 다소 늦은 시간대 방영에도 최고 시청률 45%를 기록한 <1993 판관 포청천>은 당대 한국 최고 인기 드라마들과 견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덕분일까. 요 근래도 한국 케이블 채널에선 이 시리즈 일부 회차를 이따금 방영하는 곳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이 가진 생명력이 33년의 시간을 건너 여전히 통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겠다.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 마주한 에피소드는 어째서 <1993 판관 포청천>이 훌륭한 작품으로 남았는지를 알게끔 했다. 글도 못 쓰는 어린 아이가 개봉부 판관 포증의 행차를 가로막았던가. 소녀는 제 집안에 닥친 어려움을 고하러 멀리서 개봉부 판관을 찾아 온 길이었다. 그녀가 건넨 고발장은 놀랍게도 백지였다. 글도 쓰지 못하고 증거랄 것도 구하지 못한 소녀의 억울함을 그러나 포증은 아주 오랫동안 깊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을 파헤쳐 마땅한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돈도 백도 없는 소녀의 고발장을 받고서 "글은 없으나 피눈물이 서려 있군"하고 읊조리던 포증의 모습은 이 드라마 전반을 관통하는 관료의 자세를 꿰뚫는다.

1993 판관 포청천 스틸컷
▲1993 판관 포청천스틸컷CTS

작두 앞에 황족도, 귀족도 없다

개봉부의 장 포증은 당대 남송 수도인 개봉의 치안과 재판을 담당하는 관료다. 특히 재판에 있어선 공명정대하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받는 유명 판관이기도 하다. 황제와 승상의 확고한 신뢰에 더하여 백성의 지지까지 받는 포증에게 비결이랄 건 따로 없다. 오로지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며 백성의 억울함을 지나치지 않는 것 뿐이다. 책사격인 주부 공손책, 어전 4품호위로 포증의 호위를 담당하는 전조, 개봉부 배속 무관으로 4대호위인 왕조, 마한, 장룡, 조호, 그밖에 하급 관료들까지 포증에게 바치는 충성은 가히 놀랄 만한 수준이다.

구태여 형식을 따지자면 앤솔로지 시리즈다. 한국 제작 작품 중에선 <전설의 고향>이나 <사랑과 전쟁>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테다. 주역은 고정돼 있을지라도 개별 에피소드의 배우들은 각 편마다 서로 다른 배역을 맡아 출연하기 십상이다. 판관 포청천(금초군 분), 전조(하가경 분), 공손책(범홍헌 분) 등을 비롯해 황제와 고위 관료들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지만, 개별 사건에 얽힌 인물들은 매회 같은 배우가 다른 역할을 맡아 나선다. 청백리 관료 포증이 황제의 신임을 받아 방 태사 같은 간신 무리의 위협에 맞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큰 서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각 사건과 마주하여 진실에 다가서는 판관의 이야기를 병행하는 식이다.

포증에겐 세 개의 작두가 있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다. 용작두는 황족, 호작두는 관료, 그리고 개작두는 일반 백성을 처형할 때 쓴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이 작두들은 판관 포증이 수사뿐 아니라 재판, 나아가 백성의 생사를 판단하고 직접 집행할 권한까지 가졌음을 뜻한다. 그 외의 다른 지역 판관들은 절차에 따라 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할 뿐이지만, 포증은 언제고 재판정에서 죄가 확정된 죄인의 목을 칠 수가 있다. 이토록 막강한 권한이라니!

1993 판관 포청천 스틸컷
▲1993 판관 포청천스틸컷CTS

시대가 이 드라마를 부르는 이유

<1993 판관 포청천>이 아시아권 전역에 어떻게 신드롬적 인기를 일으켰는지 돌아본다. 당초 15부작으로 예정됐던 시리즈는 모두 세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됐었다. 오늘까지 회자되는 '찰미안', '진가장원', '이묘환태자'가 바로 이들 작품이다. 이 세 편의 이야기가 대체 어떤 힘을 가졌기에 국경, 또 문화권을 넘어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던 것일까.

세 편의 공통점은 황족, 또 귀족과 관련된 이야기란 점이다. MBC가 추석특선으로 방영해 대단한 관심을 받기도 했던 '찰미안'은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 소식이 끊긴 시골 아낙이 주인공이다. 고향에 닥친 기근으로 시부모까지 숨진 뒤 아내는 두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 개봉으로 상경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남편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공주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성공에 눈멀어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려는 부마와 그를 비호하는 황족에게 대항하는 관료의 모습이 놀랍기까지 하다. 이어진 '진가장원'은 승상의 딸에게 장가를 든 또 다른 과거급제자의 비위를 파헤치는 내용으로, 포증과 우호적 관계인 왕 승상 집안의 좋지 못한 일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또한 어려움이 없지 않다. 이 작품 또한 MBC 방영 당시 큰 화제가 됐다.

마지막 '이묘환태자'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한데, 시리즈 속 황제인 송나라 인종의 출생의 비밀과 얽혀든 황실의 좋지 못한 이야기를 다룬다. 요컨대 포증이란 한 관료가 좀처럼 대항하기 어려운 당대의 질서, 권력의 중심에 거침없이 다가서 시비를 가리고 옳음을 관철하는 이야기가 된다.

작품마다 포증을 가로막는 위협과 유혹이 거듭된다. 때로는 모함과 비방이고, 또 때로는 노골적 압력이기도 하며, 수시로 이어지는 암습과 독살시도 또한 자리한다. 군왕 등 황족, 또 고위 관료들에게까지 차등 없이 칼을 들이대는 포증의 행보 탓으로 그를 지지하는 황제와 군왕, 승상 등도 난처해질 때가 적지 않다. 진실이 명확하지 않은 순간에선 이들 또한 포증에 대한 신뢰를 거두기도 하니, 기댈 곳이 따로 없는 한 명의 관료 입장에선 처세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어려울 때마다 포증이 견지하는 건 원칙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믿음, 또 불의가 횡행한 세상을 놓아둘 수 없다는 각오가 시리즈 전반을 가로질러 변치 않는 대원칙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일신의 영달을 멀어지게 하는 이 같은 자세는 도무지 평범한 이가 감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에피소드는 오로지 포증이 있어 억울하게 죽고 다치며 누명을 쓰고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을 이들이 살아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1993 판관 포청천 포스터
▲1993 판관 포청천포스터CTS

천하에 전조는 없어도 되지만

작품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입 모아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시리즈 중후반부 '어미인'이란 작품 가운데 포증을 위해 위협을 무릅썼다 죽어가던 전조가 대신 그를 구하려는 이 앞에서 "천하에 전조는 없어도 되지만 포 대인이 없으면 안 된다"고 거절하던 대목이다. '천하에 포 대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믿음, 포증과 같은 관료가 있어야만 한다는 인식을 작품 속 포증이 전조와 공손책, 그밖에 수많은 이들에게 심어낸다. 또 그와 같은 인식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까지 가서 닿는다. 전조를 연기한 배우 하가경 또한 최근 한 채널에 등장해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꼽기도 했다.

<1993 판관 포청천>은 진짜 관료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제 업의 가치를 이해하고, 일신의 영달이 아닌 업의 가치에 충실한 관리의 필요를 확인하도록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외침이, 굽은 법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에게 달리 닿는다는 불신이 공공연한 이 시대에 국가와 법체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용기를 내는 드문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갈망을 갖게끔 한다.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1993 판관 포청천>은 하나의 신화이고 전설일 뿐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기도 어려운 어떤 이례적 개인의 영웅기처럼 읽힌다. 그러나 이 작품이 국경과 문화권을 건너, 또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한 유효함을 보이는 것은 시리즈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있는 때문이겠다.

30년이 더 지난 세상은 여전히 <1993 판관 포청천> 속 영웅들을 필요로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수사와 기소, 재판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리 이야기는 선량한 시민들이 법과 질서를 불신하게끔 한다. 고작 800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은 버스기사에게 횡령죄 유죄판결을 내린 법관이 85만 원 짜리 접대를 받은 검사의 면직 처분을 취소한 것을 기억한다. 넘쳐나는 고위 공직자 자녀의 특혜채용도 빼놓을 수 없다. 시리즈 속 용작두와 호작두, 개작두가 입을 벌리는 사건들이 오늘의 세상에 넘쳐나는데, 포청천의 행렬을 막아서고 "억울합니다!"를 외칠 이들이 쏟아지는데, 우리는 과연 지금 이 시대가 안녕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걸까.

벌써 수십 년 째 포청천이 떠나지 못하고 거듭 소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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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