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3.
가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남편 찰스(크리스찬 슬레이터 분) 대신 홀로 가정을 돌보고, 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딸의 모든 상태를 관리하는 린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진다. 집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구멍과 함께 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모녀는 근처 허름한 모텔로 거처를 옮기게 되지만, 집주인은 연락도 잘되지 않고 수리를 맡은 사람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기만 한다. 영화는 이 구멍을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그린다. 틈이 날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방치된 천장을 바라보는 린다의 심리를 투영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또 하나의 구멍이 있다. 딸의 배에 연결된 섭식관이 들어가는 자리다. 앞선 천장의 구멍이 예상도 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벌어진 쪽에 가깝다면, 섭식관이 연결된 딸의 구멍은 벌써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일에 속한다. 하지만 두 구멍 모두를 향한 린다의 바람은 동일하다. 닫혔으면 좋겠다는 것. 천장의 구멍이 수리되어 닫힌다는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고, 딸의 튜브가 제거되어 몸의 구멍이 닫힌다는 것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두 구멍 모두는 린다가 바라는 방식과 속도로 닫히지 않는다.
04.
"억울하지만 우리의 잘못이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는 러닝타임이 지나면 지날수록 린다를 점점 더 수렁에 빠뜨린다. 그런 그의 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큰 무력감을 남긴다. 린다 주변에는 생각보다 조력자가 많다. 딸을 치료하는 의사 스프링(메리 브론스타인 분)이 있고, 자신의 심리 상담사(코난 오브라이언 분)가 있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때마다 통화할 수 있는 남편도 있다. 잠시 거처를 옮긴 모텔에는 호의적인 옆방 남자 제임스(에이셉 라키 분)도 있다.
문제는 그들 중 어떤 누구도 린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의사는 딸이 목표 체중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반복해서 말할 뿐이고, 남편은 전화 너머에서 상황만 전해 들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상담사 역시 린다에게 점점 인내심을 잃어간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담사의 자리에서 린다 역시 자신의 의뢰인이자 환자인 캐롤라인(대니얼 맥도날드 분)의 문제를 이해한다고 말할 뿐 직접 해결해 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문제와 사건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그로 인한 피로가 중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한다. 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내부의 린다만이 아니다. 바깥에 위치한 관객들 역시 쏟아져 나오는 피로의 무게를 함께 경험하도록 영화는 설계된다.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의 끊임없는 목소리는 청각적으로 그 무게를 더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스크린으로부터 전해지는 사건 개별의 정체성보다 무대 위에 방치되어 있는 인물 린다의 경험과 상태를 오롯이 전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서울국제여성영화제
05.
한편, 린다가 누군가의 엄마이자 심리치료사라는 설정은 인물을 더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가 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관리하도록 만드는 역할이라서다. 심지어 이 자리들은 그에게 감정적 억압까지 요구한다. 아픈 아이 앞에서 걱정 말고는 할 수가 없고, 엄마이자 아내로 인내해야 하며, 상담사로서도 타인의 감정을 받아내야 한다. 화를 낼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으며, 지치고 힘들어도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환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린다의 환자로 등장하는 캐롤라인의 존재는 그래서 더 도드라진다. 마치 린다가 할 수 없는 행동을 대신해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처럼 그려지고 있어서다. 아들 라일리를 낳은 뒤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린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해 오는 환자. 여기에는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받아 상황을 해결해 버리고 싶은 린다의 진짜 속내가 투영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는 자신의 상황도 캐롤라인의 상황도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다.
06.
"나 더 나아질 거야. 약속할게."
영화의 후반부에서 막다른 곳에 내몰린 린다는 결국 자신이 가장 없애고 싶었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한다. 딸의 몸에 연결된 섭식관의 호스를 자신의 손으로 빼버리는 일이다. 담당 의사의 판단을 무시한 이 행위는 위험하고 영화도 이를 모르고 있지 않다. 그가 견뎌온 시간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지난 시간 동안 린다의 얼굴만을 마주하도록 강요받은 채로 이제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 한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의도적으로 지켜보게 만드는 순간이 된다. 가장 폭력적이고 가혹한 방식으로 심리적 공감과 행위적 당위가 완전히 다른 영역의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내내 아무 일도 없다던 린다의 모든 거짓이 폭로되고 난 후에 그는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사건이 무너진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던 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물로 이어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 들어왔던 처음의 물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바닷물은 스스로 뛰어 들어가는 물이 된다.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망가뜨리던 대상에서 이제 더 이상 고치고 개선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물(파도)은 그 마지막 선택조차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몇 번이고 다시 바다를 향하지만 그때마다 린다는 해변으로 돌아온다. 결국 제자리가 되는 것이다.
07.
영화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는 린다가 어떤 엄마인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누군가를 지키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견딜 수 없이 싫어지는 순간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두 마음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 속의 딸을 사랑했던 존재 역시 자신의 마음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분노가 향해야 할 출구를 정확히 찾지 못한 것뿐이다. 그런 일상이 쌓이고 쌓여 사랑하는 존재를 그저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가 딸의 얼굴을 우리에게 허락했다는 것은, 극 내부의 두 사람에게도 서로의 얼굴이 허락되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상대를 위해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밀어붙이지 않을 때에야 사라지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이 이곳에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