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섭식관 호스 빼버린 엄마, 왜 바다로 갔을까

[넘버링 무비 551]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에서 모성애는 가장 본능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가운데 하나로 다뤄져 왔다. 그 믿음에 균열을 내는 작품들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로만 한정하자면,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2011)가 대표적이다. 에바(틸다 스윈튼 분)는 아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와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 사이에서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제이슨 라이트만 감독의 <툴리>(2018)에서도 육아에 소진된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는 <다이 마이 러브>(2026)가 있었다. 이 영화는 심리적으로 고립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가 되는 순간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존재를 그려낸다. 이들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성애의 결핍이 아니다. 언제나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에 조금 더 가깝다.

그런 모성을 숭고한 감정과 태도가 아닌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구체적인 노동과 관계의 문제로 한 단계 떨어뜨리는 순간 우리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생산하고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메리 브론스타인 감독의 영화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 역시 비슷한 맥락의 계보 위에 놓여 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선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너무 사랑하고 책임지는 일에 붙들린 나머지 탈진하기 직전이라는 것.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들여다볼 조금의 여유도 없이, 원인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딸(델라니 퀸 분)을 홀로 먹이고, 재우고, 상태를 확인하며 하루를 견뎌내는 엄마가 이 영화 속에 있다.

02.
"그냥 누가 뭘 하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엄마 린다(로즈 번 분)의 모습이 화면 가득 제시된다. 얼굴 뒤로 재잘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쉴 틈 없이 들려오지만 카메라는 그 모습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정기적인 상태 확인을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밤마다 튜브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 딸의 모습이 프레임 속에 잠시 들어올 때도 그가 거기에 있다는 형체 정도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딸의 얼굴이 처음 등장한다.)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이 비대칭에는 영화가 어떤 인물을 선택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지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엄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감독은 관객이 아이에게 먼저 연민을 느끼지 않고 엄마인 린다에게만 붙들려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영화가 아픈 아이의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 관객의 감정은 거의 자동으로 아이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 시작된 연민의 감정으로 인해 린다로부터 감정적으로 이탈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이를 경계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결정으로 인해 영화에 두 가지 위력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관객이 린다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과 등장인물 스스로 딸을 마주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 실제로 작품 속에서 모녀가 정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위력은 딸에 대한 린다의 역할을 감정 공유가 아닌 의무와 책임의 수행으로 전환해버린다. 영화의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서울국제여성영화제

03.
가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남편 찰스(크리스찬 슬레이터 분) 대신 홀로 가정을 돌보고, 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딸의 모든 상태를 관리하는 린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진다. 집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구멍과 함께 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모녀는 근처 허름한 모텔로 거처를 옮기게 되지만, 집주인은 연락도 잘되지 않고 수리를 맡은 사람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기만 한다. 영화는 이 구멍을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그린다. 틈이 날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방치된 천장을 바라보는 린다의 심리를 투영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또 하나의 구멍이 있다. 딸의 배에 연결된 섭식관이 들어가는 자리다. 앞선 천장의 구멍이 예상도 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벌어진 쪽에 가깝다면, 섭식관이 연결된 딸의 구멍은 벌써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일에 속한다. 하지만 두 구멍 모두를 향한 린다의 바람은 동일하다. 닫혔으면 좋겠다는 것. 천장의 구멍이 수리되어 닫힌다는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고, 딸의 튜브가 제거되어 몸의 구멍이 닫힌다는 것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두 구멍 모두는 린다가 바라는 방식과 속도로 닫히지 않는다.

04.
"억울하지만 우리의 잘못이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는 러닝타임이 지나면 지날수록 린다를 점점 더 수렁에 빠뜨린다. 그런 그의 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큰 무력감을 남긴다. 린다 주변에는 생각보다 조력자가 많다. 딸을 치료하는 의사 스프링(메리 브론스타인 분)이 있고, 자신의 심리 상담사(코난 오브라이언 분)가 있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때마다 통화할 수 있는 남편도 있다. 잠시 거처를 옮긴 모텔에는 호의적인 옆방 남자 제임스(에이셉 라키 분)도 있다.

문제는 그들 중 어떤 누구도 린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의사는 딸이 목표 체중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반복해서 말할 뿐이고, 남편은 전화 너머에서 상황만 전해 들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상담사 역시 린다에게 점점 인내심을 잃어간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담사의 자리에서 린다 역시 자신의 의뢰인이자 환자인 캐롤라인(대니얼 맥도날드 분)의 문제를 이해한다고 말할 뿐 직접 해결해 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문제와 사건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그로 인한 피로가 중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한다. 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내부의 린다만이 아니다. 바깥에 위치한 관객들 역시 쏟아져 나오는 피로의 무게를 함께 경험하도록 영화는 설계된다.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의 끊임없는 목소리는 청각적으로 그 무게를 더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스크린으로부터 전해지는 사건 개별의 정체성보다 무대 위에 방치되어 있는 인물 린다의 경험과 상태를 오롯이 전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서울국제여성영화제

05.
한편, 린다가 누군가의 엄마이자 심리치료사라는 설정은 인물을 더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가 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관리하도록 만드는 역할이라서다. 심지어 이 자리들은 그에게 감정적 억압까지 요구한다. 아픈 아이 앞에서 걱정 말고는 할 수가 없고, 엄마이자 아내로 인내해야 하며, 상담사로서도 타인의 감정을 받아내야 한다. 화를 낼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으며, 지치고 힘들어도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환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린다의 환자로 등장하는 캐롤라인의 존재는 그래서 더 도드라진다. 마치 린다가 할 수 없는 행동을 대신해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처럼 그려지고 있어서다. 아들 라일리를 낳은 뒤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린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해 오는 환자. 여기에는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받아 상황을 해결해 버리고 싶은 린다의 진짜 속내가 투영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는 자신의 상황도 캐롤라인의 상황도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다.

06.
"나 더 나아질 거야. 약속할게."

영화의 후반부에서 막다른 곳에 내몰린 린다는 결국 자신이 가장 없애고 싶었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한다. 딸의 몸에 연결된 섭식관의 호스를 자신의 손으로 빼버리는 일이다. 담당 의사의 판단을 무시한 이 행위는 위험하고 영화도 이를 모르고 있지 않다. 그가 견뎌온 시간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지난 시간 동안 린다의 얼굴만을 마주하도록 강요받은 채로 이제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 한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의도적으로 지켜보게 만드는 순간이 된다. 가장 폭력적이고 가혹한 방식으로 심리적 공감과 행위적 당위가 완전히 다른 영역의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내내 아무 일도 없다던 린다의 모든 거짓이 폭로되고 난 후에 그는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사건이 무너진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던 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물로 이어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 들어왔던 처음의 물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바닷물은 스스로 뛰어 들어가는 물이 된다.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망가뜨리던 대상에서 이제 더 이상 고치고 개선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물(파도)은 그 마지막 선택조차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몇 번이고 다시 바다를 향하지만 그때마다 린다는 해변으로 돌아온다. 결국 제자리가 되는 것이다.

07.
영화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는 린다가 어떤 엄마인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누군가를 지키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견딜 수 없이 싫어지는 순간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두 마음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 속의 딸을 사랑했던 존재 역시 자신의 마음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분노가 향해야 할 출구를 정확히 찾지 못한 것뿐이다. 그런 일상이 쌓이고 쌓여 사랑하는 존재를 그저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가 딸의 얼굴을 우리에게 허락했다는 것은, 극 내부의 두 사람에게도 서로의 얼굴이 허락되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상대를 위해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밀어붙이지 않을 때에야 사라지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이 이곳에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영화 SIWFF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다리가있다면걷어찰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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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