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골에서 AI 학습시켰더니 벌어진 일

[김성호의 씨네만세 14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 <휴먼 인 더 루프>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얼마 전 본 다큐 <사진의 얼굴>엔 1960년대 청계천변 풍경을 찍은 일본 보도사진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당시 청계천은 한국 가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가. 천을 따라 늘어선 무허가 판자촌은 매년 수십 만 명씩 유입되는 도시빈민의 터전이었다. 구와바라 시세이가 제 카메라를 들어 이곳을 찍을 때, 한국 사람들은 그 광경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다. 그건 한국의 적나라한 가난의 풍경이었으므로. 그러니까 구와바라 시세이의 렌즈를 통해 담기는 것이 오로지 가난, 절망의 광경이라 믿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 뿐은 아니었다. 그에게 구정물을 뿌리던 아낙도, '이런 것만 찍느냐'며 몰아세우던 아재도 알지 못하였던 것이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에 담겨 오늘에 전한다. 도리어 한국인이 보지 못했던 진실이 작품 안에 담겨 오늘의 관객과 대면한다. 그 사진 안엔 어떻게든 제 살 길을 터나가려는 사람들의 눈빛이, 생을 살아내는 힘이 깃든 표정이, 천진한 웃음과 솔직한 마음들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인도 영화 <휴먼 인 더 루프>를 보며 며칠 전 본 이 다큐 속 한 장면이 떠오른 건 어째서였을까. 인도 자르칸트주 외딴 마을, 아디바시 원주민이라 불리는 소수민족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는 자르칸트주는 물론, 인도란 나라도 생소한 대륙 동쪽 끝의 한국인에게 완전히 생소한 광경을 내보인다. 이 시대 기술의 최전선과 낙후된 인도의 시골마을의 연결이 바로 그것이다.

휴먼 인 더 루프 스틸컷
휴먼 인 더 루프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AI 학습시키는 인도 산골마을 원주민들

미국 실리콘벨리 기업으로부터 외주를 받아서 AI 학습을 위한 라벨링 작업을 하는 업체가 이곳에 있다. 라벨링은 AI에게 지식을 넣어주기 위한 일종의 노가다 작업이다. AI가 분별하기 어려워하는 사물을 구분하고 이름 짓는 것부터, 인간 동작이 담긴 영상을 데이터화하는 작업까지를 포괄한다. 양질의 라벨링이 이뤄져야 AI의 효과적인 작동이 가능한데, 엇비슷한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인도에서도 외진 마을까지 외주를 주기에 이른 것이다.

학습된 AI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영화에 그중 한 가지 사례가 등장한다. 이 업체에 출근하는 주인공 네흐마는 평소처럼 제게 주어진 라벨링 업무를 수행한다. 그날 그녀가 맡게 된 작업은 사진에 찍힌 곤충이 해충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 요컨대 농작물을 갉아먹는 곤충은 해충이라고 체크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작업에 앞서 팀장은 네흐마와 같은 직원들을 불러 모아 저들이 하는 작업이 어떤 일의 일부인지를 보여준다. 거대한 밭을 지나는 농기계가 있고, 그 기계 뒤편에 레이저를 쏘는 장치가 달려 있다. 그 장치는 제가 지나는 땅 위에 있는 벌레 가운데 해충으로 구분된 곤충을 레이저로 지져 죽인다. 이때 해충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건 AI다. 네흐마와 동료들이 라벨링한 데이터로 학습한 AI인 것이다.

해충인가. 아닌가. 그를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농작물을 뜯어먹는 곤충을 해충이라 표기하는 건 원청인 실리콘벨리 기술기업의 요구다. 그러나 네흐마는 자신이 'pest'라고 체크한 곤충이 먼저 본 영상의 벌레처럼 레이저에 지져져 죽을 것임을 안다. 그저 어느 한 마리의 문제가 아니다. 기계가, 어쩌면 전 세계 대농장 구석구석을 나다닐 농기계들이 제가 지난 모든 땅의 이 곤충을 몰살시킬 것이다. 그 제거, 완전한 박멸에 네흐마의 라벨링의 책임이 없지 않을 테다. 네흐마는 감히 손가락을 놀릴 수가 없다.

휴먼 인 더 루프 스틸컷
휴먼 인 더 루프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인도 시골에서 세계를 말하는 법

<휴먼 인 더 루프>는 어떤 영화인가. 그저 AI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주인공은 인도에서도 차별받는 소수민족 아디바시 원주민 여성이다. 일족의 후예 네흐마는 인도에선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러니까 나름대로 주류라 볼 수 있는 민족 구성원인 남성과 사실상의 혼인관계였다. 여기서 사실상이라 하는 것은 그 결혼이 법적으로 공증받지 않은 사실혼 관계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네흐마의 출신이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딸과 아들, 두 아이를 낳은 네흐마가 자식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자르칸트에서도 깊은 곳에 위치한 고향마을로 들어온 뒤의 이야기다. 네흐마가 AI 라벨링 업체에 취업해 일하는 건 도시에서 일하는 남편으로부터 아이들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한 간절한 필요이기도 하다.

영화는 도시에 사는 아버지에게 더 유대를 느끼며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네흐마의 딸을 공들여 비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법적 다툼까지 챙겨야 하는 네흐마의 벅찬 삶이 그와 교차된다. 말하자면 앞서 적은 AI 학습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의 절반으로, 다른 절반은 그와는 전혀 다른 인도 외딴 마을에서 벌어지는 엄마와 딸의 갈등과 극복의 서사가 차지한다. 좀처럼 엮이지 않을 듯한 두 갈래 이야기를 영화는 일견 병렬적으로 보이지만 섬세하게 엮여드는 설계로써 전개시켜나간다. 마침내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더 공고하게 하는 두 줄기 식물의 뻗어나감처럼 <휴먼 인 더 루프>가 펼쳐내는 이야기가 관객 앞에 다가든다.

휴먼 인 더 루프 스틸컷
휴먼 인 더 루프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누가 해충을 정하는가

네흐마는 말한다. 이 벌레는 해충이 아니라고, 잎을 갉아먹긴 하지만 썩은 부분을 먹어 도리어 식물의 생장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영화가 앞서 몇 차례 네흐마와 그 일족인 아디바시 원주민들의 남다른 모습을 비춘 것도 그래서일 테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아마도 대를 넘어 이어져왔을 삶의 방식을 영화는 고구마 줄기 하나를 캘 때도 주변의 다른 생물들이 상처 입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연의 소리며 풍경에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 비추는 것이다. 도시인은 좀처럼 구분하지 못하는 생강과 강황을 한 눈에 구별해내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질을 세상은 좀처럼 존중하지 않는다.

<휴먼 인 더 루프>가 구태여 이와 같은 이야기를 담아낸 까닭은 무엇일까. 네흐마와 그 딸, 다시 AI 라벨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엮여드는가. 그건 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너무 빨리 내달리는 기술과 체제, 그 사이 선택되고 배제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번진다. 해충이란 딱지가 붙은 벌레는 변명의 여지없이 밭에서, 제 터전에서 사라진다. 빠르게 개간되는 밭에서 설 자리를 잃은 그 벌레는 순식간에 멸종의 위기 앞에 놓일지 모른다. 어쩌면 생강과 강황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세상이 그 이름을 더는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존재는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따져보면 네흐마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아디바시 원주민과 같은 소수 부족은 인도 안에서도 제 존재를 잘 인정받지 못한다. 결혼대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그 삶의 방식 또한 존중받지 못한다. 그 가난이 대물림되고 이들이 사는 마을 또한 발전하지 않는다. 참다 못하여 도시로 나온 이들은 더는 아디바시족의 삶의 자세를 이어가지 못한다. 세상은 이들이 쇠락하다 조금씩 줄어들어 자연히 소멸되길 기다리는 걸까. 그게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기는 것일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포스터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 영화가 한국과 닿는 순간

영화가 AI 이미지 생성기를 통해 아름다운, 인디언, 원주민을 입력해 그 결과물을 보이는 순간이 있다. 거기엔 인도에 사는 원주민 부족의 아름다운 여성은 없다. 서구의 매스미디어가 만들어온 이미지, 심지어 인도가 아닌 '인디언'이라 불려온 아메리칸 원주민의 전형적 상이 서구 미인의 외모와 결합해 떠오르는 것이다. AI조차 멀쩡히 살아 있는 네흐마와 같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 모든 지식을 학습해가는 괴물적 존재조차 제 세계 안에 네흐마와 그 일족, 이들의 가치와 정신과 아름다움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일말의 악의조차 없이 자연히 그리되는 모습은 오늘날 AI 학습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담론 및 연구들과 깊이 닿아 있는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글 서두에 나는 우리가 잊고 있는 1960년대 청계천 판자촌의 이야기를 적었다. 그 존재를 우리는 가난이라 하여, 못살던 시절의 못난 풍경이라 하여 담지 않고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담은 기록과 이미지를 오늘의 한국인의 뇌리에 두지 않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가 대체 무엇인가.

다큐 <사진의 얼굴> 속 구와바라 시세이의 작품은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은 풍경이 그저 가난과 못남이 아님을 전한다. 그 안에 담긴 생명력과 생동감이 우리의 오늘을 이루는 힘과 마주 닿아 있단 걸, 가난이 아닌 아름다움이 또한 그곳에 있었음을 보인다. 우리가 선택하고 또 우리가 배제했던 것 가운데는 결코 그렇게 버리고 지나가선 안 되는 것이 있었음을 이 작품이 이야기한다. <휴먼 인 더 루프>가 말하는 것이 이와 떨어져 있지 않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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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