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생리하고 싶어하는 13살 소녀의 비극

[김성호의 씨네만세 141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 대상 <두아>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 열차에서 두아의 시선은 뒤를 향해 있다. 흔들림 없이. 제가 있을 곳은 그곳, 열차가 나아가는 앞이 아닌 출발한 뒤에 있다는 듯.

28회 서울여성영화제 '발견' 섹션 상영작 <두아>는 1990년대 말, 세르비아 남부 코소보에 사는 열세 살 소녀 두아의 이야기다. 코소보는 발칸반도가 세계의 화약고라 불렸던 지난 세기 말, 구 유고연방 중에서도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가 극렬한 갈등을 벌였던 지역이다. 2008년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으나 국제연합(UN)에도 가입하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남아 있다. 30년 가까이 지난 코소보의 이야기를 13살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 보나마나 그렇고 그런 영화이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든 건 비슷한 이야기가 뉴스 위에서도, 영화 안에서도 너무나 잦고 흔한 때문이겠다.

그렇다. 비극이 흔해진 시대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장이 더 확대된 채 4년 째 지속되고 있다. 주권국의 전쟁 개전권을 금지하고 자위권 행사 외의 선제타격을 범죄행위로 규정한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완전히 무시한 전쟁들이 곳곳에서 지속된다. UN은 전쟁 앞에 무력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최강대국 미국이 국제연합에서 아예 탈퇴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이다. 맥락 없는 걱정은 아닌 것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 국제기구 및 협약 백여 개를 탈퇴하고 깨부순 데 이어 사실상 괴뢰 국제기구로 평가받는 평화위원회까지 창설하고 공공연히 UN을 대체할 수 있다는 신호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십 수 년 전까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던, 역사란 진보한다던 낙관적 학자들이 죄다 입 다물고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두아 스틸컷
두아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비극이 흔해진 시대에서

<두아>는 그 흔한 비극을 스크린 가득 그려낸다. 30년 가까이 지난, 대륙 반대편 역사와 국제정세를 아는 이라면 상식으로 알고 있을 코소보 이야기가 오늘의 한국에 새롭게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듯이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가자지구, 호르무즈 해협, 돈바스지역, 레바논과 예멘, 수단, 미얀마 등지에서 한창이며, 또 신장과 위구르, 티벳 등에서도 완전히 잦아들지 않은 이 비극이 흔한 시대에 코소보 이야기가 여전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하려 든다.

두아는 코소보에서 부모님과 오빠, 또 두 언니와 함께 사는 평범한 알바니아계 소녀다. 코소보에 사는 알바니아계 소녀의 평범한 삶이란 2026년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꽤 다른 모양일 수 있겠다. 우선 우리가 평범하다 여길 만한 것부터 적어본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국으로 치면 콜라텍쯤이 될까, 무튼 남녀가 섞여 춤추는 곳의 화장실이다. 이곳에서 두아는 또래 소녀들과 치장에 여념이 없다. 화제는 오늘 누구와 어디까지 진도를 빼느냐는 것. 대화내용을 보건대 제대로 키스, 혹은 그 이상까지 나아가 본 녀석도 없는 듯하지만 서로가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오늘은 꼭 하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광경이 재미있다. 어찌어찌하여 두아는 제가 목표로 한 사내녀석과 춤을 추게 된다. 서로가 어찌할 줄 모르며 몸을 맞대고 어색하게 움직이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쳤단 소리가 난다. 모두가 도망친다.

두아 스틸컷
두아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세기 말 코소보 소녀의 평범한 삶

겨우 골목으로 몸을 피한 두아와 친구들, 두아는 황급히 가슴에 찬 뽕 두 개를 빼서 바닥에 던진다. 에이, 오늘은 공쳤구나. 소녀들 머리 위로, 그렇고 그런 생각이 지나가는 듯하다. 두아의 관심은 이런 것이다. 친구들과 비슷해지는 것, 그러니까 가슴도 좀 더 부풀고, 저만 하지 않는 생리를 어서 하고, 또 사실 별 관심이 없는 남자애와도 적당히 친해져 또래 사이에서 덜떨어진 애 취급을 받지 않는 그런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가.

그런데 1990년대 말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평범한 소녀의 삶은 우리에겐 너무나 비범하기도 하다. 이 일대엔 세르비아계 주민도 상당히 많이 섞여 산다. 앞의 학생들을 뒤쫓는 세르비아계 경찰들은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폭력적인 단어들을 내뱉는다. 절로 등골이 조여드는 말들이 그저 위협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다음날 두아는 등굣길에서 친구의 언니, 아마도 그날 같은 곳에 있었을 소녀의 사체를 발견한다. 나체로 죽어 뻗어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두아는 단박에 그녀의 이름을 대고 만다. 두아일수도, 다른 누구일수도 있었던 죽음. 그 죽음이, 그를 불러온 폭력이 두아의 삶엔 너무나 가까이 있다.

영화는 두아의 시선으로 그 삶을 그린다. 너무나 평범한 1990년대 말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소녀의 삶, 그 현실을 또 다른 세계의 평범한 관객들 앞에 펼쳐 보인다. 그러면 누구의 일상은 차마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 되고,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무게를 지고 있는 이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도대체 무엇이 이와 같은 부조리를 이 천진한 아이에게 드리우는가를 따져묻게 한다.

두아 스틸컷
두아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1999년 코소보와 2026년 세계

두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다. 아마도 영화를 본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부모가 현실 가운데선 무력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실업자다. 당시 코소보의 성실한 알바니아계 사내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러나 딸린 식구가 많아 그는 주저앉을 수 없다. 용접해 철문을 만들어서 필요로 하는 이에게 파는 것으로 업을 꾸리려 한다. 기름이 좀 더 싼 지역에서 기름을 사다 제 동네에 파는 일도 틈틈이 겸한다. 직장에 다니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직장이랄 곳이 사라지는 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솜씨 좋은 엄마는 집에서 옷을 수선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업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형편이 피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오빠는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러나 그 또한 직업도, 미래도 없다.

왜일까. 오늘의 가자지구와 팔레스타인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테다. 세르비아 남부에 위치한 코소보는 유고연방 붕괴 뒤 강성한 세르비아에 병합돼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유고연방 시절 보장됐던 자치권이 박탈됐고 분리독립에의 요구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군과 경찰력을 독점한 세르비아가 사실상 강점하고 억압했다. 코소보 독립을 외치는 세력이 해방군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벌이며 사태는 더욱 격렬하게 비화됐다. 해방군이 세르비아계 경찰을 살해한 사건으로부터 발발한 이른바 코소보 전쟁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민간인 학살까지 이뤄지며 세기말의 비극으로 기록됐다. 전쟁은 1999년 미국과 나토의 개입으로 인해 종결된다. 밀로셰비치는 국제사법재판소 전범재판이 진행되던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영화는 당시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걸 막지 않는다. 동시에 코소보에서의 삶을 핍박한다. 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공공연한 백색테러,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 명백한 차별, 사라지는 일자리 등이 알바니아계가 설 자리를 앗아간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고향을 등지지만 두아의 아버지와 같은 이는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국을 저들의 손에 그냥 넘겨줄 수 없다는 이유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포스터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가 담고 있지 않은 불편한 진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아들이 해방군에 가담하는 걸 결사적으로 막아선다. 해방군이 사실상 테러조직 수준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가담했다가 죽기 십상인 그곳에 외아들을 보낼 수가 없는 부모의 마음과 무력하게 부조리를 감내할 수 없는 청년의 의기가 맞붙는 광경이 낯설지 않다. 아마도 오늘날 가자에서, 신장위구르에서, 미얀마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한 세기 거슬러 올라가면 한반도에서도 빚어졌을 풍경인 때문이겠다.

두아의 성장기와 당대 코소보의 엄혹한 상황이 맞물리는 영화다.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문학과 영화가 무척이나 많지만 그들이 그러하듯 <두아> 또한 저만의 유효함을 전한다. 나이든 사내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그에 복수하고 저항하며 성장해나가는 한 줄기 이야기는 개인의 성장드라마이지만, 그 사내가 세르비아계 주민이며, 그에 대한 공격이 곧 제 가족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드라마와 닿는다. 이 모두가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 동시에 인물의 내면에도 충실한 드라마로 빚어져 시공간을 넘어 오늘의 관객을 설득한다. 좋은 영화다.

<두아>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경쟁부문인 발견 섹션 대상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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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