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선택받은 영화,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김성호의 씨네만세 1417]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새로운 물결'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영화제에 관객을 몰고 온다. 통상 영화제가 내건 영화는 영화제를 찾아온 관객을 만난다. 영화제를 즐기러 온 이들이 그 안에서 영화를 골라 작품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영화를 보기 위해 관심 없던 영화제를 찾는 경우도 있다. 오로지 '어떤' 영화를 보기 위해 그 작품을 건 영화제를 찾는 경우다. 나만 하더라도 이따금은 그런 경험이 있다. 반드시 보고 싶은데 놓친 작품을 보기 위하여 예정에 없던 영화제를 찾아 멀리 길을 떠나는 일 말이다.

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새로운 물결' 섹션 상영작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은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후자와 같은 작품이었을 테다. 이유는 분명하다. 이번 영화제에 걸린 작품 가운데 가장 체급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는 올해 열린 79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개막작으로 초청돼 '퀴어 팜(Queer Palm)' 상을 수상했다.

칸영화제에서 이렇게나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얼마 시차를 두지 않고 들어왔으니 많은 관심이 답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앞선 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초청해 상영했으나 발빠르게 예매에 성공한 소수만이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던 터다. 수입돼 배급이 이뤄질지도 확신할 수 없는 화제작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다시금 들여와 소개하니, 영화팬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됐다. 동시간대 다른 작품과 달리 이 영화가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한 데는 이런 사연이 자리한다.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 스틸컷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와 살 튀기는 어떤 장르의 해체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은 영화를 소재 삼은 영화다. 지나간 공포영화 <캠프 미아즈마> 리부트 작업을 맡은 젊은 감독이 시리즈 첫 편의 주연배우를 찾아가는 게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캠프 미아즈마>는 굳이 따지자면 슬래셔 영화다. 공포 중에서도 피와 살점이 튀기는 잔인한 특성을 부각한 장르물이란 뜻이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유행한 비디오 기반 시리즈물은 확실한 장르성을 부각해 저예산으로 찍어내는 게 특징이었다. 소위 B급, 그도 되지 못하는 C, D급 영화가 넘쳐났던 데는 극장개봉을 하지 않고도 비디오 유통만으로 손익분기를 넘길 수 있는 산업적 환경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시리즈물은 영화 제작사에 있어 최소한의 관심을 보장받는 손쉬운 길이었다. <나이트 메어> <13일의 금요일> <할로윈> 등 이 시대 미국 대표 공포물이 많게는 십 수 편에 이른 속편을 양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써 새로운 캐릭터와 설정을 마련하기보다 통하는 이야기를 자산 삼아 반복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계산이었다. <캠프 미아즈마>도 마찬가지여서, 그 생명력이 다하기까지 거듭 속편을 내다가 마침내 문을 닫은 그렇고 그런 시리즈인 것이다.

29살의 젊은 감독 크리스(해나 아인바인더 분)는 첫 영화를 실패한 뒤 이 시리즈 리부트를 맡게 됐다. 흥행에선 참패했음에도 일부 평론가가 가능성을 인정해준 덕분이었다. 야심찬 감독은 <캠프 미아즈마>를 그렇고 그런 시리즈의 재탕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다. 본래 시리즈를 온갖 각도에서 해부하고 해체해 PC주의에 입각한 새 시대의 품격 있는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도무지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허락할 것 같지 않은 포부를 감추지 않는다. 그녀는 베일에 싸인 채 은둔 생활을 이어가던 1편의 주인공 빌리(질리언 앤더슨 분)와 만나는 것으로 작품 제작을 위한 첫 걸음을 뗀다.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 스틸컷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과 슬래셔, 이들이 관계 맺는 방식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이 칸의 선택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잡은 데는 그 개성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슬래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다루었으나 통상의 메타영화(영화에 대한 영화)가 천착하는 주제와는 차별화되는 문제를 내보이고, 이 과정에서 읽어낼 수는 있지만 명확하게 포획할 수는 없는 다채로운 이야깃거리가 산재해 있다. 이 영화가 대체 무슨 영화인지를 말하는 게 무용할 만큼 해석이 엇갈리는데, 누구는 이로부터 여성주의를 말하고 또 누구는 영화장르나 이 시대 상업영화 시스템을 비판하는 코드를 읽어내기도 한다.

어찌됐든 이 영화가 슬래셔 영화를 찍으려는 여성 감독이 배우를 만나 관계 맺는 줄거리를 가졌다는 사실 만큼은 명확하다. 시리즈 촬영지를 매입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빌리는 영화 속에서도 언급되는 명작 <선센 대로> 속 대중에게서 잊힌 왕년의 스타 노마 데스몬드를 연상케 한다. 크리스는 빌리에게 묘한 매혹을 느끼고, 그녀를 단순한 카메오가 아닌 주연배우로 발탁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물론, 크리스는 거장이라 불리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냉정하게 말하자면 제작사가 싼 값에 쓰는 실패했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감독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고 싶다고 인기 없는 60대 여성 배우를 리부트 시리즈 주인공으로 기용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작사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번 연출을 제 작가정신을 표출할 기회로 잡으려는 크리스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좌절을 마주할 밖에 없는 이 괴리가 표면화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크리스는 아직 제작사와 본격적인 미팅을 하기 전에 시나리오 작업을 위한 사전작업 차 빌리를 만나 남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 스틸컷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런 장면 본 적 있지 않나요?

영화의 줄거리를 늘어놓는 건 무용하다. 누군가는 흥미롭게 볼 테고, 누구는 조잡하고 시시해 과대평가된 작품이라 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야기할 만한 대목은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영화 속 크리스와 빌리가 지난 시대 슬래셔무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들이 악당에게 한 명 한 명 학살당하는 게 이 장르물의 대동소이한 구조다.

그중에 어떤 전형이 있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 야외가 배경이더라도 거의 반드시에 가까운 확률로 얇은 티셔츠만 입은 매력적인 여성이 악당에게 몇 발자국 간신히 앞선 채 헐레벌떡 도망치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맨은 그녀의 가슴이 크게 출렁이는 모습을 스포츠 경기의 하이라이트처럼 잡아낸다. 목숨이 오가는 결정적 순간 가운데서도 섹시코드 만큼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이 장르의 전형은 놀랍게도 무척 빠른 속도로 꽤나 많은 슬래셔무비가 공유하는 코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은 바로 이 같은 순간을 기꺼이 재현한다. 크리스와 빌리가 갈수록 <캠프 미아즈마>의 세계관으로 빠져드는 건 이와 같은 구태한 인식이 안긴 여성성의 외상이 발현된 결과일까. 이와 같은 해석이 상당한 비약을 안고 있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자본이 장악한 할리우드의 작동방식이 여성과 장르문법, 나아가 영화예술, 심지어는 수많은 독자적 가치를 가진 대상을 무가치한 외연 안에 욱여넣어 팔아치우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영화가 그를 훌륭히 표현하진 못했대도 건드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과대평가에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포스터서울국제여성영화제

훌륭한 영화일까, 과대평가된 작품일까

한편 요 몇 년 칸영화제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주목할만한 시선이란 주요한 부문, 퀴어팜 상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는 않다. 소위 시네필을 자임하는 많은 이들이 서울국제영화제서 이 작품을 찾아본 것만 해도 그렇다. 영화가 끝난 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들 중에 여럿이 이 영화 하나 때문에 영화제를 찾았다고 말하였는데, 영화제가 이 같은 작품을 가져오며 기대한 효과 또한 이와 관련이 없진 않을 테다. 이들 중 다수가 또한 '프랑스놈들에게 또 속았다'는 평을 내놓았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나 또한 있음에도, 이 영화가 기댄 문제의식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과연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은 훌륭한 영화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과대평가된 작품일까. 부디 이 영화가 꼭 수입돼 한국 관객과 만나 그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미아즈마캠프에서생긴일 제인쇼언브런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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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