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가네코 후미코> 스틸컷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3.
후미코에게 내려진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기 위해 영화 초반부에서 주어지는 일본 천황의 감형장과 이를 즉각적으로 찢어버리는 그의 태도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근본적인 의미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삶에 연결된 소유권을 더 이상 타인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 장면에서 '감형'에는 국가가 선고한 형을 줄인다는 의미 외에 죽음이 예정된 사형수의 삶을 구원해 줬다는 의미가 하나 더 따라붙는다. 누군가의 생을 살려준다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되고, 이는 반대의 측면에서 감사의 의무를 부과받는 모양새가 된다. 후미코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데 그 삶이 권력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런 의도가 감춰진 감형을 통해 일제와 황실이 받아내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전향 성명이다. '지난 행동을 반성하고 감사하다'라는 성명을 받아내 자신들의 선전에 이용하고자 하지만, 그런 후미코의 의지로 인해 도리어 초조해지고 마는 것이다. 책과 필기구를 빼앗기고, 징벌방에 가둬지고, 수갑과 구속복이 채워지는 등, 이후 그는 수감 생활 동안 끊임없이 자유를 빼앗긴다. 물론 이 모든 조치와 탄압은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일 뿐, 후미코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까지는 마지막까지 바꿔내지 못한다.
04.
"저는 이 권력이 참을 수없이 화가 납니다."
삶에 대한 소유권에는 하나의 의미가 더 있다. 영화가 현재의 장면 사이로 과거의 일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출생신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호적에서 배제되었던 어린 시절, 맡겨진 친척 집에서 겪어야 했던 학대, 조선에서 목격한 식민지 현실과 3.1 운동,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 후에 만나게 된 박열과 급진적 사상 등이다. 이 모든 장면들은 영화가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후미코라는 인물이 스스로 쌓아온 사상과 걸어온 길을 완성해 내는 또 하나의 장치다. 누군가가 누군가보다 위에 존재하는 구조, 사랑 뒤에 숨은 부모의 학대와 박애 뒤에 숨은 국가의 폭력을 벗어나기 위한 것. 이는 결국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로 이어지며,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는 영화의 일부로 밀려난 인물 박열에 대해서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하마노 사치 감독은 이준익 감독이 그려낸 영화 <박열> 속에 갇힌 가네코 후미코를 보며 강한 불만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읽어왔던 것과 달리 그가 박열이라는 인물의 생에 지나치게 묶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열과 페어를 이루는 짝이 아닌,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후미코를 그리겠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점이 된다. 감독은 그런 의도 안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박열의 삶으로부터 이탈시킨다.
물론 두 사람이 나눈 관계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준익 감독이 박열을 비춘 것처럼 하마노 사치 감독은 가네코 후미코를 비추는 것. 어떤 자리에 포커스를 두느냐의 차이 정도가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비추는 소수의 장면 속에서도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장면,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후미코가 제시하는 세 가지 약속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이 평등한 관계이자 사상적으로 권력과 타협할 경우 이별하게 될 것임을 약속하는 순간 또한 앞서 이야기했던 '삶의 소유권'과 연결된다. 이 영화에서는 박열 역시 후미코가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보여주는 대상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가네코 후미코> 스틸컷서울국제여성영화제
05.
한편, 형무소에 갇힌 가네코 후미코의 시간이 혼자만의 투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살펴볼 만하다. 여성 수용소에 수감된 그가 마주하게 되는 인물은 대부분 같은 여성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후미코를 감시하거나 사상 전향을 위해 교화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교도관은 물론 교회사, 불도부인지회에서 파견된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처음에 권력의 편에 서 있던 이들의 마음은 후미코의 강한 기개와 불굴의 태도를 지켜보며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공동 투쟁을 펼치거나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식의 형태는 아니지만,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물리적인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관객들이 함께 목격하게 된다.
이 영화는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도 기대는 부분이 있다. 일본 원제에 붙은 부제이기도 하며, 극 사이사이 그가 실제로 작성한 문장이 배치되고도 있다. 감독은 이 책에서 자신이 일본 영화계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1971년 감독으로 데뷔해 수백 편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 핑크영화 감독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경험이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당한 경험'의 시대를 뛰어넘는 연결성이 오래 지속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당위를 얻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후미코의 모습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06.
"이런 상태로 살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26년 7월 23일, 후미코는 23살의 나이로 독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적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을 스크린 위로 옮겨온 것이지만, 이 장면에서도 존엄에 대한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남긴 단가 중에는 손발이 자유롭지 않아도 죽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그 죽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취지의 문장이 존재한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정의 당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자유와 존엄을 지켜내고자 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에는 가족이,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가, 여성으로서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수감 이후에는 국가 권력이 후미코의 위치를 결정했다. 사형을 선고했다가 감형하고, 그 대가로 전향을 요구하는 과정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순교를 쉽게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끊은 목숨이 어떤 성취나 승리로 쉽게 읽히는 것으로부터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맥락에서 죽음을 선택할 자유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의 초상일 수 없다. 그보다는 현재 존재하는 것을 부숴버리는 것이 자신의 직업이라던 후미코가 살아 있는 상태로는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 세계에 대한 가장 참혹한 증언에 가깝다. 어떤 형태의 억압과 회유 속에서도 한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정의하겠다고 결정한다면, 결국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존재 그 자체라는 사실. 그것만큼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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