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일제에서 해방된 지 81년이 흘렸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이 알려진 게 25년 되었다. 위안부 사실이 알려진 언론과 시민단체는 일본의 사과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 해결된 걸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지난 14일 KBS 1TV <추적 60분>에서는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 편이 방송되었다. 중국 쑹산에 있던 위안소의 피해자들이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군에게 심문받는 모습 공개로 시작한 이날 방송에서는 세계 곳곳에 있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추적하는 내용이 담겼다.
취재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지난 21일 해당 회차 연출한 신은주 PD와 전화 연결했다. 다음은 신 PD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
▲<추적 60분>의 한 장면
KBS
- PD님은 평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원래 어떻게 생각했나요?
"많이 아는 것도, 적게 아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이 문제를 꾸준히 다루는 방송사가 많지 않고, KBS도 매년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 주제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새롭게 볼 수 있을지 고민하며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 프롤로그에서 1945년 인도 안다만 제도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모습을 담았잖아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프롤로그를 어떤 장면부터 시작할지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어요. 시청자들에게 뭔가 새로운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인도 안다만 영상은 영국 해군이 촬영한 자료인데, 저희가 그 해군의 후손을 취재하면서 컬러 영상까지 찾아냈어요. 이걸 쓰면 좀 더 거시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보통 위안부 피해는 한국·일본을 중심으로 떠올리는데,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인도 안다만 같은 곳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이었어요. 한국인 위안부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강한 인상이 남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 세계대전 때문에 세계 곳곳에 위안소가 있었던 건가요.
"맞아요. 저도 취재하면서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부분이에요. 전쟁의 범위가 워낙 넓다 보니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나 오지 같은 곳곳에도 위안소가 설치됐더라고요. 호주의 테사 모리스 교수님과 온라인 인터뷰를 했는데, 그분 논문을 보면 전쟁이 끝난 뒤 병사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여자들을 봤다'는 진술이 나와요. 그런데 심문했던 사람은 그 부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고 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들까지 위안소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상황에서도 비슷한 피해를 겪는 여성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영심 할머니와 위안부 소녀들우측에 임신한 여성이 고 박영심 할머니다. 박 할머니 옆으로 불안한 얼굴의 위안부 모습과 가장 왼쪽에 밝게 웃는 군인이 매우 대조적이다.
김종훈
- 중국 쑹산이 나오더라고요.
"참고로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부르는 게 맞는 표현이래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아마 교과서에 실렸던 만삭의 위안부 사진일 거예요. 박영심 할머니가 임신한 채로 찍힌 그 사진인데, 촬영 장소가 바로 중국 쑹산이거든요. 그래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진은 박영심 할머니가 위안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에게 구출되던 순간에 찍힌 건데, 이후 박영심 할머니는 병원으로 갔고 함께 구출된 다른 동료들이 심문받는 영상을 이번에 새로 발굴했어요. 학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영상이고, 저희도 새로운 발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서 이 이야기로 먼저 구성했습니다."
- 영상은 어떻게 찾았나요?
"함께 작업한 선배 김형석 PD님이 지난해 찾았다고 들었어요. 선배가 끊임없이 새로운 영상을 찾는데, 여러 영상 사이에 이 영상도 섞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그 영상 처음 봤을 때 어땠나요?
"일단 화질이 너무 좋았어요. 인물들의 표정 같은 게 다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당시에 이렇게 구출되고, 연합군과 중국군에게 이런 식으로 심문받았겠구나' 하고 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정말 도움이 되는 영상이었어요. 편집하다 보니 붕대를 감은 한 소녀의 표정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기도 한 그 모습이 계속 잔상처럼 남았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전쟁 물품처럼 인식"
▲<추적 60분>의 한 장면KBS
- 일본군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자결하라는 지침을 내린 거 같던데 왜일까요?
"저는 학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키나와 취재 때 들은 이야기로는 마지막까지 연합군과 일본군의 격전지였던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패색이 짙어지자 주민들에게도 자결을 권유했다고 해요. 특히 딸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는 '패자를 잡으면 더 독하게 강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래서 자결을 권했다고 하더라고요. 명확한 지침이라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권유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발굴한 영상도 사실 심문 영상이잖아요. 전문가 얘기를 들어보면, 연합군 입장에서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고 판단했을 거예요. 군인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함께 이동했으니까요.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런 내부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걸 우려했을 수도 있고, 또 하나는 당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유한 전쟁 물품처럼 인식했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적군에게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아 자결을 권했을 가능성도 있고,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거라고 봐요."
- 일본 가와다 후미코 작가는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어떻게 들었다고 하나요?
"1970년대 배봉기 할머니가 최초 증언하셨어요. 근데 본인이 먼저 증언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배봉기 할머니는 한국 국적인 채로 일본에서 계속 돌아오지 못하고 은둔하며 사셨는데, 일본 정부가 신원이 확인 안 된 외국인이라며 강제 이주를 시키려던 상황이었어요. 그러자 배봉기 할머니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위안부였다'고 밝혔고, 그게 일본 사회에 기사로 나왔대요.
가와다 후미코 작가가 그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파서 배봉기 할머니를 찾아간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후유증이 심하셨고, 1990년대에 KBS가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거절하셨어요. 하지만 가와다 후미코 작가는 계속 관심을 두고 수차례 찾아갔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가 몇 년에 걸쳐 이어지면서 서로 신뢰 관계, 즉 라포가 형성됐던 것 같아요. 작가는 오랜 시간 녹음한 내용을 바탕으로 <빨간 기와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 증언을 들어보니 어땠나요?
"(배봉기)할머니 살아온 과정이 정말 기구했어요. 굉장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취업 사기 비슷한 형태로 끌려가셨는데, 그 과정이 어릴 때부터 위안부 피해를 입기까지, 그리고 전쟁 이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상세하게 담겨 있어서 너무 슬펐어요.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전쟁이 끝나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한국말을 거의 다 잊어버리셨는데, 그 와중에도 '고향'이라는 단어와 저희 영상에도 나오는 노래 하나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게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 배봉기 할머니는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거죠?
"한국어를 잊어버린 상태였던 게 당시 피해 여성의 공통점이었대요. 한국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고향에 돌아가서 어떻게 먹고살지에 대한 두려움도 컸던 것 같고요. 또 돌아가려 해도 어떻게 가야 할지 방법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해요. 노명선 할머니의 경우도 귀국선을 타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못 타셨다고 하더라고요. 전쟁이 끝났어도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가족이 찾아와 주는 것도 아니고, 가족조차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곳에서 계속 삶을 이어가신 거예요."
-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요.
"저는 대만 취재를 맡았는데, 관련 자료들이 다 대만에 있다 보니 가져오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노명선 할머니 관련 인터뷰도 대만의 한 단체가 갖고 있어서, 국가가 다르다 보니 협조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고향을 찾는 과정도 쉽지 않았어요.
국내엔 노명선 할머니를 아는 전문가가 한 명도 없어서, 요시히사 아마에 교수의 논문에 의지해 단서를 찾았는데 거기엔 충청남도로 나와 있어서 충청남도 시·군·면에 협조 요청까지 했어요. 그런데 대만 현지인을 통해 확보한 1947년 대만 한교명부를 보니 실제로는 경상남도로 돼 있더라고요. 논문에 착오가 있었던 거죠. 그만큼 할머니에 대한 정보와 자료가 제한적이라, 하나를 확인하는 데도 발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 계속 관심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볼 게 아니라, 여성 인권이라는 더 큰 틀에서 이 문제에 계속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취재했지만 방송에 안 나온 것 중 얘기할 게 있다면요.
"사실 저희가 노명선 할머니의 얼굴을 확보했었어요. 할머니로 추정되는 영상이 있었거든요. 할머니가 92년 8월 14일 공개 증언을 하셨는데, 뉴스에는 장막을 치고 얼굴이 안 보인 채로 나갔잖아요. 그런데 대만 국사관에 직접 가보니, 그 장막 뒤에서 촬영된 카메라 영상이 도서관에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의 얼굴이 담긴 영상을 확보하게 된 거예요.
하지만 이걸 방송에 내는 게 맞는지에 대해 윤리적으로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당시 할머니가 얼굴 공개를 원치 않으셨다면, 지금 고인이 되셨다 해도 공개하지 않는 게 맞다는 내부 논의 끝에 결국 내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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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끝난 후 구출된 일본군 위안부 영상, 어떻게 구했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