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에서 감독으로... "첫 한 달 동안은 매일 밤 악몽"

[인터뷰] 다큐 <흔적들(Traces)>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

[기사 수정 : 22일 오전 10시 6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는 20일 개막작 〈정거장〉으로 28번째 문을 열었다. 개막작을 연출한 예멘계 스코틀랜드 영화감독, 사라 이스하크 (Sara Ishaq)는 여성 전용 주유소를 주요 무대로 10년 넘게 이어진 예멘 내전의 실상을 우회적으로 담아냈다. 특히 참혹한 분쟁 속에서도 삶을 견지하는 여성들의 회복력과 만연한 갈등 속에서도 기쁨으로 가득한 여성 연대를 희극적 감각으로 그려낸 영화라는 관점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렇듯 전쟁 중 여성들의 감동적인 회복력과 아름다운 연대의 힘은 '새로운 물결' 섹션에 초청된 우크라이나의 다큐영화 〈흔적들 (Traces)〉에서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물결' 부문은 굵직한 해외 영화제에서 여성 주제의 화제작으로 호평받은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는 전 세계 여성영화의 최신 흐름을 조망하는데 도움을 준다. 올해는 독일, 튀니지, 우크라이나, 캐나다, 수단 등 해외에서 제작된 10편의 장편영화와 10편의 단편영화를 소개한다.

알리사 코발렌코 (Alisa Kovalenko), 마리샤 니키튜크 (Marysia Nikitiuk)가 공동 연출한 〈흔적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전시 성폭력 (CRSV:Conflict-Related Sexual Violence)과 고문을 겪은 뒤에도 침묵을 거부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한다. 과거 포로로 잡혔다가 성폭력을 당했던 주인공 이리나 도우한 (Irina Dovgan)은 우크라이나의 탈환 지역을 찾아다니며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집단적 초상을 그려나간다.

이리나는 다른 생존자들과 더불어 용기와 돌봄의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정의를 위한 싸움을 해나간다. 영화는 전쟁범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넘어, 역경을 함께 이겨낸 여성들의 강인한 회복력과 서로의 곁을 지키는 연대의 힘을 섬세한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 다큐멘터리 <흔적들>을 연출한 알리사 코발렌코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다큐멘터리 <흔적들>을 연출한 알리사 코발렌코alisakovalenko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처음으로 전시 성폭력 피해를 공식 증언한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은 연출의도에서 "칠흑 같은 어둠과 비극, 참혹한 폭력과 고문에 대한 견디기 힘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빛과 치유로 나아가는 길이 있으며,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면서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마침내 우크라이나의 전시 성폭력 생존 여성들을 '피해자'라는 그늘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목소리를 키우고, 트라우마 이후의 성장을 보여 주며, 여성의 회복력과 연대의 힘을 강조한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또한, 그는 "이 영화는 전 지구적 연대를 촉구하는 외침이자, 모든 폭력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은 23일 영화상영 후 화상을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나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필자는 지난 20일 서면 인터뷰 이외에도 올해 2월 베를린영화제, 3월 라트비아 리가 (artdocfest) 및 체코 프라하 (One World 인권영화제) 등 다수 영화제에서 코발렌코 감독을 만나 우크라이나 전시성폭력 생존자 지원단체, 세마 우크라이나 (SEMA Ukraine)의 인권활동에 대해 꾸준히 대화를 나눠왔다.

세마 우크라이나의 주요 회원들은 다큐멘터리 <흔적들>의 주인공들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21일과 23일 공식 상영을 앞두고 관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세마 우크라이나의 구체적인 활동을 위주로 한 내용을 요약정리했다.

- '세마 우크라이나 (SEMA Ukraine)' 소속 회원들에 관한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다소 긴 이야기다. 2014년, 저는 키이우에서 영화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는데 러시아의 침공 초기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돈바스로 향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마이단 혁명 직후였다. 돈바스로 갔다가 검문소에서 붙잡혀 러시아 방첩 장교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강간을 당했다. 저는 그후 성폭력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지도 몰랐고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간 건 제 선택이었으니 제 탓이라고도 느꼈다. 아울러 제 고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1년 넘게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실험적 다큐멘터리 연극을 접할 기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 피해경험을 털어놓았다. 일종의 치유 연극이었다. 저는 우크라이나 '난민 극단' (Displaced Theatre)'의 설립자인 게오르크 제노(Georg Genoux)와 포로 생활 중 겪은 일들을 재구성해 연극 <포로 생활 (Captivity)>을 썼다. 또한 우리는 연극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는데, 저는 제 자신을 맡았고 그는 가해자 역할을 맡았다. 몇몇 언론인이 이 연극에 대해 기사를 썼고, 그 기사를 읽은 헬싱키 인권 단체가 저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2014년부터 돈바스에서 발생한 성폭력 및 전쟁 범죄를 기록하고 있었다. 저는 그들의 증언 요청을 수락했다. 이를 계기로 포로 생활 중 겪은 성폭력과 고문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흔적들>의 주인공인 이리나 도우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시 성폭력과 고문을 겪은 우크라이나 여성 생존자들의 첫 모임에 저를 초대했다. 한마디로 수많은 연쇄반응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일종의 치유연극인 실험적 다큐멘터리 연극에서 스스로 직접 출연한 코발렌코 감독의 공연 모습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은 우크라이나 난민극단이 창작한 실험적 다큐멘터리 연극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았다. 난민 극단의 설립자인 게오르크 제노와 함께 포로 생활 중 겪은 일들을 재구성해서 연극 <포로 생활>을 쓰고 연기도 했다. 본인이 겪었던 혼돈과 트라우마를 다시 직면하며 논리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일종의 치유연극인 실험적 다큐멘터리 연극에서 스스로 직접 출연한 코발렌코 감독의 공연 모습알리사 코발렌코 감독은 우크라이나 난민극단이 창작한 실험적 다큐멘터리 연극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았다. 난민 극단의 설립자인 게오르크 제노와 함께 포로 생활 중 겪은 일들을 재구성해서 연극 <포로 생활>을 쓰고 연기도 했다. 본인이 겪었던 혼돈과 트라우마를 다시 직면하며 논리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displaced theatre

- 한국 관객들에겐 다소 생소한 엔지오 '세마 우크라이나'를 간략히 소개해 달라.

"SEMA는 스와힐리어로 '목소리를 내다' 또는 '목소리를 높이다' 라는 뜻이다. 세마우크라이나는 글로벌 연대체인 '세마 네트워크 (SEMA NETWORK)'의 일원으로 2019년부터 활동해 왔다. 세마네트워크 (전시 성폭력 종식을 위한 피해자 및 생존자 글로벌 네트워크)는 201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드니 무퀘게 박사의 재단이 설립했으며,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중동, 유럽 등 29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마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전쟁에서 성폭력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맞서 싸우고 있고 17세부터 78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생존자들이 참여한다. 우리는 생존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사회로부터 지지를 느끼며, 러시아의 범죄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심리적 지원 뿐만 아니라, 의료 및 법률 문제 해결을 전담하는 다른 전문 기관들과의 연계도 돕고 있다.

제가 생각하는 회복 과정의 첫걸음은 일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트라우마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피해자들이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있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매 같은 동등한 입장의 수평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울러,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수치심을 떨쳐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며, 사회적 낙인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된다."

- 우크라이나에서 이러한 전시 성폭력은 얼마나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나.

"정확한 피해자 수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데다 많은 사람이 난민이 되어 국외로 떠났기 때문이다. 또한, 성폭력은 가장 침묵당하고 사회적으로 낙인이 생기는 범죄다. 검찰청이 현재 약 401건의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군인들은 이 수치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생존자 기금 (Global Survival Fund)'이 지원하는 임시 배상 시범사업에 따르면, 1080명이 분쟁 관련 성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이들의 사건은 (검찰청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정부를 대리해 사건을 심사하는 위원회를 거쳐 처리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전시 성폭력 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를 이미 보여주고 있다. 시리아 측에서도 이 방식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자국 내 피해자들에게도 동일한 제도를 시행하고자 하는 것 같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

"전면 침공 이후, 폭력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단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하고 있는 끔찍한 전쟁 범죄에 대해 전 세계가 알 수 있도록 이 문제를 큰 소리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참고로 우리 단체의 규모도 세 배로 늘어났다.

다행히도 우리는 반인도적 범죄를 기록하기 위한 소액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경험을 영화로 만들어 생존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고, 기억을 보존하는 수단이 되도록 하자는 것은 우리 모두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저는 깊은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무척 두려웠다. 심리적으로 그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시성폭력 생존자들의 집회 모습 가운데 나이드신 활동가가 영화 <흔적들>의 주인공 이리나 도우한 (Irina Dovgan). 세마 우크라이나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전시성폭력 생존자들의 집회 모습가운데 나이드신 활동가가 영화 <흔적들>의 주인공 이리나 도우한 (Irina Dovgan). 세마 우크라이나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Oleksandr Roshchyn



-본인 또한 성폭력 피해자다. 영화 감독으로서 정말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 한동안 고통 속으로 뛰어들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처음에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피해자들이 들려주는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다시 내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첫 한 달 동안은 매일 밤 악몽을 꿨다. 수백 가지 버전의 악몽을 꾸었는데, 제가 다시 포로로 잡혀 있는 꿈, 고문당하는 꿈, 다른 이야기들에서 들은 폭력적인 요소들이 뒤섞인 꿈 등이었다. 제 머리는 이 모든 폭력의 기억을 칵테일처럼 뒤섞어 놓았고, 너무 큰 고통 때문에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서 의지할 어깨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때 공동 감독인 마리샤 니키튜크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리샤는 고맙게도 제게 심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엄청난 큰 힘이 되어주었다."

-많은 다른 나라의 경우, 생존자들이 전쟁이 끝난 후 몇십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반면 흥미로운 점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진행 중인 지금,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마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7년 동안 공동체로 활동하다가 그 후 정식 단체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재활이나 심리 치료 등을 필요로 하는 다른 여성들을 돕는 데 주력했지만, 점차 피해 여성들이 시민사회의 리더로 성장했다. 우리는 심지어 입법 과정에도 참여했는데,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전시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의회가 이 법안을 채택하고 서명하여 통과시켰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고 독보적인 사례로 알고 있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이런 법을 시행했다.

저는 생존자들이 우리 사회의 회복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이제는 남성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전시 및 포로 생활 중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하고 있다. 또한 이는 단순히 성폭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가 자행해 온 고문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유엔인권보고서에 따르면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전쟁 포로의 거의 90-95%가 구타, 전기고문등을 당했고, 여기에는 성고문도 포함된다."

전쟁의 잔인함이 나무에도 남긴 상처의 흔적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은 자신이 밝힌 연출의도에서 "이 영화는 매우 강한 인권적 메세지를 담고 있지만, 특별한 시각 언어와 섬세한 심리, 깊은 이미지를 통한 예술적 창의성과 영화적 접근으로 균형 잡는 일 역시 중요했다. 이는 지극히 미묘하고 예민한 주제이며, 나 자신이 겪은 일이기에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특유의 섬세한 영화 언어를 찾아내야 했다. 이 영화는 연상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 인물과 그들 주변의 세부와 분위기, 실내 공간, 자연과 그 상태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을 통해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전쟁의 잔인함이 나무에도 남긴 상처의 흔적알리사 코발렌코 감독은 자신이 밝힌 연출의도에서 "이 영화는 매우 강한 인권적 메세지를 담고 있지만, 특별한 시각 언어와 섬세한 심리, 깊은 이미지를 통한 예술적 창의성과 영화적 접근으로 균형 잡는 일 역시 중요했다. 이는 지극히 미묘하고 예민한 주제이며, 나 자신이 겪은 일이기에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특유의 섬세한 영화 언어를 찾아내야 했다. 이 영화는 연상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 인물과 그들 주변의 세부와 분위기, 실내 공간, 자연과 그 상태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을 통해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alisakovalenko

-다른 배경을 가진 전시 성폭력 생존자들과의 교류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보스니아 생존자들과의 첫 교류 경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와 1995년 집단학살이 일어났던 스레브레니차를 방문해 현지 여성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눈앞에서 형제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성분이 계셨다. 당시 14세였던 그녀는 세르비아계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정말 고통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제게는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비극이 벌어졌던 그 언덕 위에 서서, 그녀가 현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깊은 자매애를 느꼈다. 언어도 문화도 달랐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토록 강력한 연대를 느꼈던 그 특별한 순간은 제게 큰 영감을 주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웁살라 분쟁데이터프로그램 (UCDP)' 연구진에 따르면, 작년에만 지구상에 총 65건의 무력분쟁이 존재했다. 이 중 개별 국가 간 직접적인 분쟁 건수는 8건으로 동 대학교가 1946년 데이터 수집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수치다. 전쟁 중 성폭력을 겪은 다른 생존자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우리는 여러 나라의 많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작년에는 생존자 간 대규모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우간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남수단, 우간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온 여성들이 함께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은 물론, 우리가 직면해온 어려움과 성공, 성취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정말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고, 침묵과 낙인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회에서는 해결을 위한 상황이 더 복잡하겠지만, 우리는 많은 근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오직 연대를 통해서만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생존자들이 침묵을 깨고 서로를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 한국 시민사회와 연대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의 엔지오들과 우리의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저에게는 분명 큰 영광이 될 것이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우리가 모두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같은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놀랍고 감동적이다. 물론 때로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크게 실망하거나,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보며 깊은 슬픔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이런 교류를 나누다 보면, 저 자신이 더 큰 투쟁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은 곤충에 불과한 존재가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이런 경험은 스스로에게도 큰 힘이 되며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아울러 요즘 저는 우리나라의 존재감이 묻혀버릴까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우리가 그저 무심코 지나치는 백색 소음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벌써 몇년이 지나서인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잊혀진 것 같다. 사람들은 이 상황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백색 소음의 벽을 뚫고 우리의 목소리를 타인에게 들려주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흔적들>과 같은 영화가 담고 있는 실제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이야기가 그 벽을 허물고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제 영화가 한국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흔적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알리사코발렌코 ?SEMA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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