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극장에 걸린 BL, 이게 말해주는 것

[김성호의 씨네만세 1413] 일본 BL 애니 <극장판 기븐 - 바다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3년쯤 전인가. 웹소설 업계 관계자, 뮤지컬 업계 관계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BL, 그러니까 'Boys' Love'라는 장르가 한국을 넘어 범아시아 권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웹툰과 웹소설 등 웹 매체 기반 콘텐츠 시장에선 매출 기준 상위권을 독식하는 주류 중 주류 콘텐츠로 분류된다는 걸 알지 못하였다.

BL과 관련한 온갖 소식에 어리둥절하는 내게 모두 여성이던 이들은 입을 모아 작품과 관련 콘텐츠에 대한 실 결제액으로는 남성향 무협이며 판타지 같은 장르를 죄다 합쳐도 BL 하나에 근접하지 못한다며 이 장르가 가진 시장 규모가 어마어마하단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무엇보다 웹을 넘어 기성 매체로 이 장르가 터져 나오게 될 시점이 그리 멀지 않았다며, 벌써 발 빠른 자본은 양질의 BL콘텐츠를 사 모으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려주었다. 이 장르는 국경 안에서는 기성 매체와 나이 든 세대로, 국경 밖으로는 아시아 전역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얘기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할리우드와 유럽, 또 한국 영화계 안에서도 성소수자를 드라마적으로 다뤄온 작품이 그간 꾸준히 있지 않았는가. 기존의 작품과는 완전히 장르적으로 선을 긋고, 남성 동성애를 재료로 여성향에 맞추어 판타지적으로 변형하는 BL장르가 그토록 번성할 수 있을까 의심하였다. 기성 작품 가운데선 그 흔적조차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만약 일부 매체를 통해 번성한다 해도 주류 매체로 진입하긴 쉽지 않으리라 여겼다.

'음악 BL'의 간판, 한국에서 먹힐까

극장판 기븐 - 바다로 스틸컷
극장판 기븐 - 바다로스틸컷미디어캐슬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다. 오는 26일 한국 극장에 정식 개봉하는 <극장판 기븐 – 바다로>가 BL장르 가운데는 드물게도 메가박스 단독 개봉으로 일반 대중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동급생> <해변의 에트랑제> 같은 애니메이션이 작은 규모로나마 극장개봉에 이른 바 있지만, 한 작품 극장판이 규모를 키워가며 연속 개봉에 이른 사례는 BL 장르 가운데선 찾기 어렵다.

2020년 처음 한국에 개봉한 <극장판 기븐>의 관객수가 4000명에 달했고, 2024년 <극장판: 기븐_히이라기 믹스>는 8000명을 넘겼다. <극장판 기븐 – 바다로>가 이전의 성과를 넘을 것이란 예측이 많은 가운데, BL장르 극장 최고 기록을 쓰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기븐>은 BL 중에서도 '음악 BL'이라 불리는 세부 분과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 불린다. 만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라디오 드라마 형식의 CD, 정식 드라마, 연극 등이 여럿 제작됐다.

특히 애니는 일본에서 인기 높은 작품만 거쳐 간다는 후지TV '노이타미나(심야 애니 방송시간대)' 방영을 BL 장르 최초로 뚫어내며 화제를 일으켰고 심지어 시청률까지 꽤 나와 BL은 하위장르라는 짙은 편견을 박살 냈다. 지상파 TV를 넘어 3편의 극장판 애니가 제작돼 극장에 걸리고, 전편 해외 수출까지 이룬 것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BL 팬들은 이것이 이례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지속될 장르적 흥행의 시발점이라고 말한다.

극장판 기븐 - 바다로 스틸컷
극장판 기븐 - 바다로스틸컷미디어캐슬

<기븐>은 기본적으로 밴드의 이야기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밴드 '기븐'의 멤버들이 꿈을 찾아가는 와중에 연애도 하는 뭐 그렇고 그런 얘기다. 밴드 내 여러 인물이 밴드 안팎에서 파트너와 연애하고 역경을 겪고 그러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그런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통상의 음악영화나 애니와 다른 점이라면 사랑, 그중에서도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가 부각된다는 점일 텐데, 그렇다고 음악을 배제하진 않는다. 음악과 연애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이랄까.

<극장판 기븐 – 바다로>는 원작 만화 가운데 후반부를 다룬다. 밴드 나름의 역경과 극복, 인물 개개인의 서사, 또 인물 간 갈등과 애정을 중첩해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후반부는 결국 밴드 '기븐'의 콘서트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성장, 음악과 사랑에의 열정을 확인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기존 작품을 챙겨보며 서사를 따라온 이들을 관객으로 상정하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덜어낸 구성은 근래 팬덤이 확고한 작품의 극장판 애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그러니까 독립된 작품이 아닌, 팬덤이 극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애정을 새로이 확인하고 즐기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이들에게 극장은 더는 주요하거나 권위를 가진 매체가 아니다. 소위 양지라 불렀던 인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저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주는 공간일 뿐.

극장판 기븐 - 바다로 스틸컷
극장판 기븐 - 바다로스틸컷미디어캐슬

익숙하지 않겠지만 팬들이라면

<기븐> 시리즈, 심지어는 BL이란 장르를 접한 적 없는 나와 같은 관객에게 <극장판 기븐 – 바다로>와 같은 애니는 당혹의 연속이다. 이제껏 다른 애니의 극장판이 가졌던 최소한의 배려, 그러니까 전작을 보지 않은 관객을 이해시키고 납득케 하는 서사를 아예 배제한 것부터 그렇다. 당연히 만화며 애니, 극장판 전편까지 완전히 숙지했으리란 전제 아래 매우 큰 보폭으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들로 다짜고짜 내달린다.

이는 기존 다수 미디어믹스 창작물이 가진 딜레마, 극장판은 기존 원작 팬과 극장 관객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한쪽만 취한 극단적 사례다. 종종 한 쪽을 취하는 사례를 본 적은 있으나 이 정도까지 심한 경우는 처음이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BL처럼 소위 양지와 음지를 나누는 취향 강한 장르물 극장판에서 이런 경우가 잦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음에도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일반 관객 입장에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영화랄까.

그리하여 작품을 보는 내내 BL이란 장르물이 한국을 위시한 범 아시아권에서 큰 호응을 받는 이유를 돌아보게 된다. BL 장르물을 소비하는 절대다수는 여성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여성이 저를 투사할 수 있는 여성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애니에 이토록 열광한다는 사실이, 또 같은 작품에 서구 여성들은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이색적이다.

기실 <극장판 기븐 – 바다로>는 BL, 또 원작의 팬이 아니면 도무지 즐기기 어려운 영화다. 극중 인물의 감정선은 관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 오르내리고, 서사 또한 통상의 드라마들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그리하여 배려 없거나 완성도 낮은 작품이라 폄훼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팬들에겐 달리 다가올 수 있음을 안다. 마치 오랫동안 스포츠를 봐온 이들이 특정 선수의 어느 경기 하이라이트만 잘라놓은 편집본만 보더라도 그때 그 시절의 감정을 온전히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BL, 그중에서도 극장판은 이제까지의 독립된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유희되는 장르이자 매체라 해야 옳겠다. 그리고 이 장르의 한국 영화계 방문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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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