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만에 3000만 원으로 뚝딱 만든 영화, 세계가 주목하는 까닭

[김성호의 씨네만세 1411]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의 문화예술계를 뜯어보자면 한국과 극명히 대비되는 풍토가 몇 가지 눈에 띈다. 그중 선명한 한 가지가 장르성이 각광받는단 점이겠다. 다채로운 장르문학과 장르영화가 활발히 제작되고 평가받는 일본의 상황은 도무지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작가가 정통 추리소설로 시작해 사회파 추리문학의 거두를 넘어 일본 문학계의 대표주자로까지 추앙받았는 광경은 여러모로 이색적이다. 오로지 히가시노 게이고 뿐 아니다.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등 그와 견줄 만한 거장들 또한 그러하고, 이들을 길잡이 삼아 뒤따르는 수많은 후배들도 그러하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번성하는 일본영화계와 대비되는 한국영화의 현실을 구태여 멀리서 찾아볼 필요는 없다. 올해 30회째를 맞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중심은 단연 일본 영화였고, 그중에서도 40세 내외의 젊은 감독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반면 한국영화 가운데 수준 있는 장르물로 관객을 놀라게 한 영화가 있었는가를 떠올리면 민망해질 수밖에 없다. 개별 감독의 역량과 수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서로 자극받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문화, 적극적인 도전과 실패를 장려하는 풍토가 있고 없음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다.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스틸컷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스틸컷팝엔터테인먼트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하는 장르영화

지난해 여름 수입 배급된 일본영화 <2분마다 타임루프>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씨네만세에서 따로 다루었던 이 영화는 간단한 아이디어 하나로 장편영화 한 편을 제작한 희귀하고 도전적인 사례로써 바라볼 만한 작품이다. 일본 원제는 강을 뜻하는 '리버'였는데, 한국에선 관객 유입을 노려보다 노골적인 제목으로 고쳐 달았다. 교토 외곽 키부네란 동네에 위치한 숙박시설인 료칸에서 2분마다 거듭 시간이 회귀한다는 기상천외한 설정으로 86분의 러닝타임을 버티는 작품이다. 요컨대 같은 상황이 40여 번 반복되는 동안, 이 료칸의 직원이고 손님인 인물들이 벌이는 좌충우돌이 곧 영화의 얼개를 이루는 소동극이다.

한정된 공간, 정해진 인물만 등장하는 상황을 오로지 아이디어만으로 극복해야 하는 탓으로 자칫 지루하거나 진부해지기 쉬운데, 재기 있는 각본으로 그 같은 문제를 상당 부분 극복해 냈다. 2024년 제33회 일본영화비평가대상 각본상을 비롯, 해외 장르영화제에서도 호평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은 30대 후반의 젊은 연출자 야마구치 준타, 그가 이 같은 작품을 찍어낼 수 있었던 데는 앞서 몇 차례 겪어냈던 비슷한 작품의 연출이 큰 자산이 됐다는 평가다. 바로 그 자산이 된 작품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이 이달 개봉해 한국 관객과 만났다.

2021년 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 격인 넷팩상을 받은 작품이다. 같은 해 캐나다에서 열리는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서도 관객상을 수상했고,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비평가상을 받는 등 주목받았다. 장르성 강한 세계 영화제들에서 각광받은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이 무려 5년의 시간을 돌아 한국에 오게 된 건 한국 문화예술계가 그만큼 다양한 장르영화에 친숙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스틸컷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스틸컷팝엔터테인먼트

끝없이 이어지는 형상을 시간 위에?

규모 있고 스타가 나오는 블록버스터, 스릴러며 액션, 코미디 등 특정 장르에만 문호가 열려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한국영화의 좁은 수용폭이 알게 모르게 관객의 취향을 형성하고 창작자의 창작욕 또한 자극하지 않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단 건 비평계와 현업자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과 같은 작품이 한국 영화계에 던지는 의미 또한 있다고 여긴다.

한국에선 웹소설 가운데 반영되어 알려진 개념인 '드로스테 효과(Droste Effect)'란 말이 있다. 본래 미술계에서 쓰이던 이 용어는 유사한 형상이 반복돼 시작과 끝, 그 경계를 알 수 없도록 이어지게 하는 기법을 가리킨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양편에 거울이 하나씩 달려 있던 지난 시대 엘리베이터를 떠올려보면 될 테다. 어느 쪽 거울을 보든 반대편 거울이 비쳐서, 각 프레임 안에서 끝이 없는 형상의 이어짐이 지속되는 상황 말이다. 결국 너무 작아진 형상을 인간의 시력이 감당할 수 없어 보지 못할 뿐이지 그 형상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게 드로스테 효과다. 이를 미술적 기법으로부터 캐어 와서 시간이 반복되는 일종의 '루프'를 서사 가운데 구현하는 작가들이 있다. 야마구치 준타가 2021년 시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목에서부터 드로스테 효과를 예고한 영화는 정말이지 이야기 전체를 이 하나의 아이디어로써 지탱해 낸다.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일본의 소형 주상복합 건물이다. 1층 카페와 2층에 있는 카페 사장의 집이 중심된 공간이 되는데, 영화 내내 이 건물이 주가 된다.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스틸컷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스틸컷팝엔터테인먼트

2분의 간격이 영원히 늘어설 수 있을까?

이야기는 카페 주인 카토(토사 카즈나리 분)가 우연히 제 방에 있는 모니터와 1층 카페에 놓인 TV가 2분의 시차를 두고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되며 시작된다. 집에서 본 모니터에 카페에 있는 제 모습이 뜨는 것이다. 심지어 TV 속 자신이 제게 말을 걸어 카페로 오라고 말하니 직접 확인하러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카토는 2분 후 자신이 되어 다시 2분 전의 자신과 만난다.

2분의 시차를 두고 두 개의 모니터를 매개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늘어서는 상황은 곧 드로스테 효과를 극대화한 모니터의 병렬로 구현된다. 앞서 예시로 든 엘리베이터처럼 모니터 두 개를 양쪽에 두어 2분씩의 시차를 둔 수많은 모니터를 일렬로 놓아두게 되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매우 먼 시간까지 닿을 수 있는 드로스테 효과로써 카토와 친구들은 어떤 일들을 해내고 당하게 될까. 이것이 영화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이다.

야마구치 준타의 영화를 본 적 있는 이라면 얼마쯤 예상 가능하고, 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영화일 테다. 요컨대 영화 가운데 대단한 무엇, 이를테면 통상의 시간여행이나 타임루프 영화가 예비하는 대단한 음모나 계획, 삶 전체를 바꾸는 사건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예상할 수 있으리란 것. 반대로 예측할 수 없는 건 한 편의 소동극 가운데 배치된 2분 간격의 사건과 그 전개, 또 결말일 테다.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포스터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포스터팝엔터테인먼트

30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이런 영화를!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2분간의 에피소드다. 2분 전의 우리와 만나고 2분 후의 우리를 확인하기 위한 현재적 노력의 반복이다. 그로부터 부각되는 것은 도리어 현재이니, 말하자면 시간의 중첩과 왜곡 가운데서도 진실로 우리의 삶은 바로 지금에 있다는 선명한 깨달음이 된다.

대단한 소품도, 당대의 유명배우도, 이곳저곳으로의 로케이션도 없는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고작 300만 엔, 한화로 30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제작비로 만든 저예산 영화다. 1주일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찍었고, 스마트폰에 부착 가능한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활용해 직접 촬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비를 절감했다.

공을 들인 부분은 편집으로, 영화를 보는 이는 마치 <버드맨>과 같은 작품처럼 원테이크처럼 느껴지는 인상을 받게 된다. 절묘한 동선과 카메라움직임, 적절한 편집이 맞물려 관객에게 마치 영화 속 인물의 곁에서 함께 기이한 일을 겪는 듯한 감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시도가 효과를 발하는 덕분에 영화는 그대로 당대 참신한 장르영화란 평가를 얻었다. 고작 300만 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창작자가 이룩한 주목할 만한 성과다. 나는 이를 5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한국 영화계가 감탄하고 반성하며 바라봐야 마땅한 성취라고 여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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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