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연인들> 스틸
㈜마노엔터테인먼트
"나랑 같이 가겠소?"
늙수그레한 남자 하나가 침입해 왔다. 설마 도둑일까 싶었는데 진짜 도둑이었다. 어둑해진 빈집인 줄 알고 살금살금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으니 도둑이 아닐 리 없다. 도둑은 때려잡아야 맛이다. 휑한 시골집을 지키는 은자의 성정이 그렇다.
그런데 겁도 없이 때려잡아 보니 이 남자, 뭔가 이상하다. 다르다. 격하게 저항하거나 힘을 쓰지도 않는다. 느긋하니 예의 바르다. 몰래 내뺄 만도 한데 도망칠 줄도 모른다. 세상 외로운 은자(정애화)는 이 범상찮은 남자 팔복(기주봉)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알고 보니, 팔복은 전국을 유랑하며 소소하게 빈집을 터는 방랑객. "나랑 같이 가겠소?"라는 팔복의 한마디가 외로운 은자의 삶에 작은 풍랑을 일으킨다. 그것도 심장이 벌떡이는 긍정적인 풍랑을.
"오해하지 마시오! 난 부끄럼을 모르는 도둑놈은 아니오."
기주봉 배우가 발성하는 팔복의 대사는 은은해서 더 다정하다. 심지어 플러팅도 수준급이다. 이름름하여 '담배 플러팅'이다. 은자의 동네에 캠핑카를 대체할 만한 낡은 봉고차를 몰고 나타난 이방인 팔복은 담배 하나 달라는 은자에게 담배 한 갑을 건네고선 유유히 사라진다. 은자의 시선이 팔복의 봉고 뒤로 꽂힌다. 이들의 첫 만남이다.
은자는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삶이 영 갑갑한 여자다. 동네 아낙들에게 소소한 시비를 걸거나 남의 임금 체불을 보다 못해 대신 싸움에 나선다. 욕쟁이에 흡연가에 병나발을 부는 걸 보니 아마도 알콜 의존증에 가까울 것이다. 나이 먹어 외롭고 혼자라 더 외롭다. 이런 어머니 은자에게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무슨 소양이랴.
그런 은자에게 팔복은 일종의 구원자다. 불량식품이 더 맛있는 길티 플레저 같은. 없어진 반지를 찾으려 몰래 봉고에 숨어들어 따라나섰다 신세계를 발견한다. 푼돈이나 챙기는 팔복의 빈집 털이는 은자에게 있어 심장을 뛰게 하는 일탈이다. 게다가 유랑하는 삶이라니 생의 의지를 되살피는 긍정적 일탈인 셈이다. 팔복이 빈집에 놓인 가족사진을 들고나오는 것도 짐짓 매력적이다.
노년 로맨스에 로드 무비가 펼쳐질 조건이 완성됐다. 매사 툴툴대고 고집 센 은자가 팔복을 만났을 때 관객들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묘한 로맨스를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둘은 몸을 쓰지 못할 만큼 노인도 아니다. 남루한 듯 낭만적이다. 모텔 방에 걸린 그림을 해석해 줄줄 아는 팔복의 유유자적에 몸을 맡긴 은자는 그렇다고 순종적이지만도 않다. 까칠해서 더 종잡을 수 없는 은자 캐릭터는 이 낯선 로맨스에 예상치 못한 생기를 부여한다.
팔복이 은자와의 정착을 꿈꾸며 갈등이 싹튼다. 푼돈이 아닌 더 큰 돈을 탐하는 팔복이 은자는 마뜩잖다. 딱히 범죄자로 전락하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는 은자는 자기만의 철학이 분명하다. 삶이, 인생이 그렇듯 일탈이 불러온 전개는 예상치 못한 결말로 흐르는데 그것조차 오롯이 은자의 선택이 된다. 언제든 훌훌 털고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만 같은 팔복을 따라나선 그 선택 말이다.
노년 로맨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두 배우
▲<빈집의 연인들> 스틸㈜마노엔터테인먼트
요 몇 년 노인을 주인공 삼은 독립영화가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각각 1만과 4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한 해 개봉한 봉한 독립영화 전부를 심사 대상으로 삼는 들꽃영화상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이다. 윤주상, 양희경, 박종환이 주연한 <아침마다 갈매기는>과 장용, 박근형, 예수정이 출연한 <사람과 고기> 모두 넷플릭스에 공개돼 장기간 차트에 올랐다.
두 편 모두 노인들이 자의나 타의에 의해 범죄에 연루되거나 일탈에 나서는 공통분모를 공유해 흥미롭다. 여기에 추가할 수 있는 <빈집의 연인들>은 노년의 로맨스에 포커스를 맞췄다. 배우 최민식이 인터뷰 석상에서 종종 "멜로를 찍고 싶다"고 강조했던 로맨스, 중년도 아닌 노년 로맨스 말이다.
올드할 거란 선입견을 보기 좋게 허물어 버린다. 노년이라 더 새롭고 더 갈피를 잡기 어렵다. 팔복은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은 자유인이다. 은자는 심리적 안식처가 필요한 독거노인이다. 이 둘이 빈집을 터는 행위는 범죄와 생활이 맞지만 일종의 존재증명이기도 하다. 독창적인 소재를 포착한 1995년생 신인 김태휘 감독의 시선에 섬세함과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특히나 말수 적은 팔복이 툭툭 던지는 대사들은 명배우 기주봉의 중저음 목소리에 담겨 묘한 신뢰감과 함께 극 전체에 안정감을 불어 넣는다. 팔복은 관점에 따라 범죄자이자 떠돌이일 수 있다. 팔복의 궤변도 기주봉이 뱉으면 그럴싸한 논리가 부여된다. 늙은 빈집 털이의 순정이야말로 <빈집의 연인들>을 지배하는 기기묘묘한 매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최근 <경주기행> 개봉을 앞둔 김미조 감독의 장편 데뷔작 <갈매기>는 정애화 배우의 재발견이라 할 만했다. 연극 무대에서 오래 활약해 온 정애화는 성폭행을 당한 중년 여성의 투쟁기를 설득력 있게 연기해 제9회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바 있다.
이후 다수 독립영화 감독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정애화가 <갈매기> 이후 다시금 물을 만났다. 정애화는 까칠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팔복과의 로맨스에 속을 끓이는 은자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이물감 없이 소화해 냈다.
이 둘의 연기는 노인을 소외나 주변부 관점에서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팔복과 은자를 주체적으로 그리는 <빈집의 연인들>의 주제 완성에 피를 수혈하고 숨을 불어 넣었다. 또 독립영화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호흡 긴 쇼트들 안에서 어디까지가 애드리브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자연스러움으로 작품 외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자연으로, 지방으로 떠나는 청춘남녀의 일탈과 확실히 대비된다. 쇼트 길이와 함께 전주를 비롯해 익산, 임실, 부안, 완주 등 전북 전역에서 올 로케이션한 풍광을 너른 사이즈로 담아낸 촬영도 주제와 맞물려 노년의 일탈이란 감정을 북돋워 준다.
<빈집의 연인들>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J 비전상을 수상하며 전북 로컬 영화제로서의 매력을 확인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어 지난해 파리한국영화제와 프랑크푸르트한국영화제, 전북독립영화제에 이어 올해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에 소개됐다.
촬영 당시 29살이었다던 김태휘 감독은 실제 본인 할머니에게서 받은 영감을 통해 노년의 감정과 일상에 주목했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와 <오디세이>가 점령한 올여름 극장가를 비집고 개봉한 이 노년의 팔딱팔딱 뛰는 로맨스를 스크린으로 직접 확인해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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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니스트 및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전 FLIM2.0,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