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그건 정말로 중요할까? 뒤죽박죽 섞인 영화에서 헤매보기

[김성호의 씨네만세 1412] <고양이를 놓아줘>

서사에 있어 시간은 주요한 요소다. 앞과 뒤, 먼저와 나중이 시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야기는 도입으로부터 출발하여 결말로 맺음 한다. 이를테면 근래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를 보라. 트로이 전쟁 10년의 끝에서 아카이아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지장 오디세우스는 조국 이타카로의 귀환 과정에서 온갖 역경을 마주한다. 신들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로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오로지 저 혼자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결말은 어떠한가. 왕좌를 노리는 구혼자들을 척결하고 아내인 페넬로페와 함께 행복한 여정을 떠난다. 이타카의 왕좌는 아들인 텔레마코스에게 돌아간다. 질서는 복원되고 정의는 세워진다. 요컨대 해피엔딩이다.

적어도 <오디세이>의 9할은 역경이다. 고난이다. 절망 앞에서 허덕이는 미력한 인간의 분투다. 이야기엔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쾌감보다는 고통이 많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보고서 슬픔과 절망과 고통의 서사라고 말하는 이를 보았는가.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 많은 이들에게 <오디세이>는 역경을 돌파하고 질서를 바로 세우는 영웅의 서사로 다가든다. 그건 오롯이 결말 때문이다. 이야기의 끝, 12개의 도끼를 꿰뚫어내는 오디세이의 화살처럼 호쾌하게 박히는 해피엔딩 덕분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결정적이다. 앞에서 뒤로 흐르는 선형적 시간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재료의 총량을 압도한다. 극 가운데 절망과 고통과 슬픔이 훨씬 더 많을지라도 그 결말에 이르러 흐망과 기쁨과 쾌감이 더 크면 된다. 앞과 뒤를 하나의 축으로 이어 펼쳐놓은 선형적 구조에서 결말은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이타닉> 속 유람선의 침몰과 연인의 죽음이란 비극에도 로즈가 살아남아 끝끝내 잭과의 약속을 지켜왔음을 증명하는 결말을 배치함으로써 극은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와 딸의 잠깐의 조우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모든 동료를 잃었으나 마침내 마을을 지켰다는 결말이 이야기를 완전히 달리 보도록 한다. 그것이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익숙한 관객의 흔한 인식이자 감상법이다.

고양이를 놓아줘 스틸컷
▲고양이를 놓아줘스틸컷안다미로

낯선 형식, 낯선 영화

<고양이를 놓아줘>는 이 같은 인식에 저항하는 영화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을 앞에서 뒤로 시간 순으로 늘어놓아 관객으로 하여금 결말에 의미를 두도록 하는 통상의 서사적 기법을 채택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비선형적 전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에피소드를 배치하지 않은 이 영화는 앞의 것을 뒤에 두고 뒤의 것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낯선 감상과 마주하도록 한다. 단순히 순서를 왜곡하는 선택을 통하여 관객은 선형적 배열이 미치는 영향을 도리어 실감하게 된다.

모리(후지이 소마 분)와 마이코(타니구치 란 분)는 동거하는 커플, 혹은 부부처럼 보인다. 음악을 하는 모리는 성공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듯 거의 백수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한때는 제법 아꼈던 것으로 보이는 장비들까지 중고로 처분하려는 것이 삶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단 걸 짐작하게 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때문일까. 모리에게 느껴지는 우울과 무기력이 곁에 있는 마이코까지 잠식하는 듯도 하다. 성공으로 가는 길이 뚜렷하게 내다보이지 않는 예술가의 삶이라지만 함께 나아가지 못하는 연인의 존재는 버겁기만 하다. 마이코와 모리의 관계가 꼭 그런 듯도 하다.

이내 영화는 또 다른 인물 아사코(무라카미 유키노 분)를 모리 곁에 세운다. 아사코는 한때 모리와 가까운 관계였던 듯한데,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모리와 아사코의 관계는 금세 두 사람이 뜨거웠던 순간으로 돌입한다. 이전의 답답하고 우울했던 순간과는 다른, 청량하고 어딘지 풋풋하기까지 한 감성이 이들 남녀 사이에 움튼다. 만약 이들의 관계가 다른 누구를 속이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싹튼 아름다움은 더러운 것이 되는 것일까.

고양이를 놓아줘 스틸컷
▲고양이를 놓아줘스틸컷안다미로

멈춰 있는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영상이기에

그러니까 영화가 일종의 불륜이나 배신을 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영화는 앞에서도, 또 뒤에서도 어떤 관계의 단면을 보일 뿐이다. 남자는 같지만 여자는 다른 이들 관계는 조금 불행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더 오래되고 공인된 사귐과 더 행복하고 매혹적인 듯하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불온함을 안고 있는 듯한 남녀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관계를 그렇게 보는 것은 영화의 의도인가. 아니면 관객이 스스로 보고자 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인가.

영화가 통상의 선형적 서사를 채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혼란에 놓일 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에피소드를 이어냄으로써 관객의 이해를 증진하는 배려 있는 연출 대신, 부자연스러운 연결로써 극중 인물의 사정을 정확히 포착하는데 실패하게끔 하는 것이다. 인물과 상황을 보아 알더라도 시점을 모르게 함으로써 판단에 혼란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열리는 것인데, 어떤 관객은 그럼에도 판단할 것이요 다른 관객은 판단을 포기한 채 혼란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둘 중 무엇이 나은 것인지를, 혹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누가 있어 장담할 수 있을까.

영화엔 마치 지진과 같이 선반이나 탁자에 놓인 물건이 흔들려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한다. 그와 같은 특별한 장면이 서로 다른 인물의 시선에서 서로 달리 보여짐으로써 관객은 이 영화가 시간순으로 배치된 선형적 이야기가 아님을 의식적으로 깨닫게 된다. 먼저인 줄 알았던 것이 뒤에 것이고, 뒤의 것이 도리어 앞의 이야기임을 알게 될 때 인물이며 상황에 대한 관객의 판단과 이해 또한 달라지게 된다.

고양이를 놓아줘 스틸컷
▲고양이를 놓아줘스틸컷안다미로

같은 사건의 순서가 뒤바뀔 때

동일한 사건이 그저 전사와 후사가 바뀌는 것만으로 다른 판단을 받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까. 오디세우스가 끝내 귀환한다면 모든 고통은 영웅적 모험이 되고, 귀환하지 않았다면 그저 비극이 되는 것, 그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일까. 시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오만하고 왜곡된 해석일까.

<고양이를 놓아줘>는 무슨 영화인가. 혹자는 그저 무기력한, 혹은 자기 표현에 충실한 어느 예술가의 나날을 그린 작품이라 말할 수가 있겠다. 저와 꼭 맞지 않는 사람, 혹은 그리 좋지 못한 시절을 함께 보내는 이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맞지 않는 듯 보이는 사람조차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선 더없이 잘 맞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수 있다. 이건 중요한 이야기인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일까.

영화가 그 답을 명확히 내리고 있는 듯 보이지 않으므로, 혹은 아예 배려 없이 내팽개치고 있는 듯 보이는 탓으로, 이와 같은 영화는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관객 또한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동시에, 꼭 그러한 이유로 이런 영화도 필요한 것이라고 항변하는 관객이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비틀어보는 시도만으로도 관객에게 영화란 예술의 의미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하지 않느냐며.

고양이를 놓아줘 포스터
▲고양이를 놓아줘포스터안다미로

고양이를 놓아주지마

<고양이를 놓아줘>가 무책임한 작품이란 이야기와 색다른 영화란 주장에 나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모두가 이 영화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처럼 스스로조차 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를 두고 허덕이는 영화조차도 관객에게 이로움을 주기도 한다. 30분 짜리 문제풀이 끝에 오답을 내고 마는 경험이 오로지 실패만은 아닌 것처럼.

500페이지짜리 소설책을 낱장으로 흩은 뒤 마구 섞어 읽으면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에 대한 고민은 또한 이야기를 다루는 이가 한 번쯤 머물러 봄직한 문제일 수 있다. 그게 영 쓸모없는 문제라고 여긴다면 <고양이를 놓아줘> 속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고양이를 제목으로 끌어올린 이유 같은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일 테다.

고양이는 여러 가축이며 반려동물 중에서 인간과 그다지 효율적으로 소통하거나 공명하지 못하는 종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그와 같은 다름 앞에서 인간은 고양이를 놓아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늘 이 넓은 공간과 시간의 축 가운데 겹쳐 있다는 사실을 즐기며 함께 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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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