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거나 나쁘거나"...영화로 보는 악녀의 얼굴

20일부터 7일간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열려, 동시대 여성영화 수작 한자리에

세계여성영화의 현주소를 조명하는 자리이자 영화를 통해 연대를 만들어가는 축제, 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SIWFF, 8월 20일 ~ 8월 26일)는 작년에 이어 'F를 상상하다'라는 슬로건 하에 '깜박임'(Flicker)에 주목한다. 오류나 불확실성이 아닌 고정되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용기와 상상력으로 가득한 여성영화들을 엄선했다.

동시대 전쟁의 참상과 이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와 회복력을 다룬 <정거장>을 개막작으로, 성평등·다양성·포용의 가치를 여성의 시선으로 조망하는 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난다.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의 한 장면. 가족으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여성을 연기한 로즈 번의 열연이 매력적인 작품.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의 한 장면. 가족으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여성을 연기한 로즈 번의 열연이 매력적인 작품.SIWFF

다채로운 섹션 중 여성영화 화제작들을 한데 모은 '새로운 물결' 상영작들의 면면이 흥미롭다. 칸, 베를린, 베니스, 선댄스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작품들을 위시한 신작들을 소개한다. <베스턴>으로 친숙한 독일의 거장 발레스카 그리제바흐의 신작 <꿈꾸던 모험>은 불가리아 국경 배경의 서부극으로 비전문 배우들의 시너지가 독특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며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화제작.

작년 베를린영화제와 골든글로브를 비롯 유수의 영화제에서 로즈 번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다리가 있다면 걷어찰 텐데>는 슬픔과 불안에 짓눌린 여성의 무게감에 관한 가감없는 클로즈업이 인상적인 수작. 국내 개봉이 요원한 상황에서 스크린으로 영화의 강렬함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의 한 장면. 칸영화제 퀴어종려상 수상작.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의 한 장면. 칸영화제 퀴어종려상 수상작.SIWFF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미아즈마 캠프에서 생긴 일>도 SIWFF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다. 전설의 슬래셔 영화를 재건하려는 여성 감독의 고군 분투를 다룬 메타 퀴어 호러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퀴어종려상 수상에 걸맞은 영화적 쾌감과 절정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다.

대만의 시민사회를 조명하며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비전을 확장해가는 퀴어·페미니즘·풀뿌리 혁신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민주주의 요리하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겪은 성폭력과 고문에 맞선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록하고 연대하는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한 <흔적들>도 만날 수 있다. 또, 기나긴 여정에 담긴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현재와 갈등, 연대의 입체적 풍경을 담은 <히즈라>, 권력과 남성질서에 맞선 수단 목화 재배 소녀의 이야기 <목화의 여왕> 등 비범한 주제와 동시대의 목소리를 담은 여성영화 화제작들도 이름을 올렸다.

 <가네코 후미코>의 한 장면. 영화 <박열>로도 친숙한 가네코 후미코의 마지막 투혼을 다룬 작품.
<가네코 후미코>의 한 장면. 영화 <박열>로도 친숙한 가네코 후미코의 마지막 투혼을 다룬 작품.SIWFF

일본 여성 감독들의 작품 7편을 소개하는 특별전 '일본 여성영화, 세대와 시선'도 기대를 모은다. 핑크영화부터 정치적 여성영화까지 300편 이상을 연출한 하마노 사치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니시카와 미와의 조감독 출신으로 첫 장편영화 <트로피>를 선보여 호평받은 손명아 감독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세대와 감각을 대표하는 일본 여성감독들의 대표작과 화제작을 소개한다.

저예산 여성주의 영화의 거장 하마노 사치의 신작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동지, 연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가네코 후미코의 마지막 생애를 다룬 작품. 그동안 거의 기록되지 않았던 사형 선고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중심으로 가네코 후미코 최후의 투쟁을 그린다.

 <트로피>의 한 장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재일한국인 3세 손명아 감독의 데뷔작으로, K-POP 아이돌 공연에 가기 위해 아버지가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팔아버린 14살 재일조선인 소희의 이야기.
<트로피>의 한 장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재일한국인 3세 손명아 감독의 데뷔작으로, K-POP 아이돌 공연에 가기 위해 아버지가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팔아버린 14살 재일조선인 소희의 이야기.SIWFF

<해변으로 가는 길〉은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 속에서 일상의 모험을 이끌어내는 필모그래피를 선보였던 요코하마 사토코 감독의 신작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 상영작.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바닷가 마을을 둘러싼 따뜻한 시선이 넘실대는 여름영화. 그밖에 떠오르는 시네아스트 기요하라 유이의 <모든 밤을 기억하다>와 손영아 감독의 <트로피>에 이르기까지 일본여성감독 영화의 흐름과 변화의 지표를 목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개막작 <정거장>의 한 장면. 예멘 내전의 참혹한 분쟁 속에서 여성 전용 주유소를 운영하며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개막작 <정거장>의 한 장면. 예멘 내전의 참혹한 분쟁 속에서 여성 전용 주유소를 운영하며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SIWFF

영화의 역사에서 '악녀'의 생성과 변주를 살펴보는 '미치거나 나쁘거나: '악녀'의 사회학' 섹션도 흥미롭다. 사회적 규범과 여성의 욕망이 충돌하며 '악녀'로 규정된 여성의 서사를 유의미하게 짚어낸 영화들을 소개한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메데아>, 카를로스 사우라의 <카르멘>,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의 여자> 등 세계영화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거장들의 대표작들을 비롯해, <매트릭스> 이전 워쇼스키 자매를 세상에 알린 레즈비언 하드보일드 누아르 <바운드>, 여성 버디 누아르의 불모지인 한국영화에서 유효한 가능성을 제시한 류승완의 <피도 눈물도 없이>, 이자벨 위페르가 악명 높은 백작부인 뱀파이어를 연기한 <블러드 카운테스>에 이르기까지 욕망과 선택을 좇으며 가감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의 시선과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에 집중한다.

'나쁜 엄마'에 관한 사회적 판단과 논의를 이끌어내며 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데뷔작상을 동시에 거머쥔 <생로메르>도 이 섹션을 통해 소개된다.

 <바운드>의 한 장면. 워쇼스키 남매의 출세작으로 장르와 캐릭터를 전복하는 퀴어 네오 누아르. 무삭제로 공개된다.
<바운드>의 한 장면. 워쇼스키 남매의 출세작으로 장르와 캐릭터를 전복하는 퀴어 네오 누아르. 무삭제로 공개된다.SIWFF

특히 "아마도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감독"이라는 찬사를 받은 존 카사베츠와 그의 뮤즈이자 위대한 배우 지나 롤랜즈의 대표작 <영향 아래의 여자>는 사회적 요구의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의 붕괴에 관한 놀랍도록 밀도있는 클로즈업과 불안을 형상화하는 솜씨가 일품인 걸작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정하는 사회적 규범과 끝내 회복하지 못하는 여성의 그늘에 관한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주류 스릴러에서 고정된 팜므파탈과 악녀의 공식을 전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바운드>도 스크린으로 온전히 접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 혜성처럼 등장한 퀴어 네오 누아르의 강렬한 마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감흥을 선사한다. 고전 누아르의 매력과 배신과 반전이 난무하는 전복적 서스펜스의 향연 속에서 당시 본 적 없는 캐릭터들의 끈적한 질주가 강렬한 쾌감을 안길 수작. 국내 개봉 당시 일부 삭제된 장면들을 원본 그대로 만날 수 있다.

9편의 상영작을 통해 모성, 욕망과 권력, 몸과 감정의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이 어떻게 '나쁜 여자'로 명명돼 왔는지를 되짚어 볼 수 있겠다.

 <티켓>의 한 장면. 배우 김지미가 첫 제작한 영화로, 80년대 티켓다방을 배경으로 성착취의 구조와 시대의 명암을 냉철하게 응시한다.
<티켓>의 한 장면. 배우 김지미가 첫 제작한 영화로, 80년대 티켓다방을 배경으로 성착취의 구조와 시대의 명암을 냉철하게 응시한다.SIWFF

그밖에 1980-90년대 여성 노동과 연대의 시간을 기록한 콜렉티브 영화 실천의 궤적을 둘러보는 '1980-90년대 여성 노동과 연대의 시간을 기록한 콜렉티브', 제작자와 배우로 활약하며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김지미의 대표작들 중 주체적 여성성을 강조한 영화 세 편을 상영하는 '김지미, 모순과 혁신의 초상'도 기대된다. 사회적 관습과 퀴어 재현의 방식을 묻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SIWFF의 대표적 섹션 '퀴어 레인보우' 등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작품 구성이 돋보인다.

한편, 28회 SIWFF는 오는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메가박스 신촌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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