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판석 감독님, 덕분에 많이 웃고 울었습니다

향년 64세로 별세한 안판석 감독, '하얀거탑'·'밀회'·'풍문으로 들었소' 등 대표작 남겨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이라고 했다. 지난해 JTBC 드라마 <협상의 기술> 방영 당시 <중앙일보>외 인터뷰한 안판석 감독은 40대 때 <시학>을 팠다고 했다. 그는 "시대와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는 한 편의 문학과 같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모든 드라마는 사실에 입각해 연출해야 한다. 비현실적인 스토리라도 정말 디테일하게 풀어 놓으면, 역설적이게도 리얼리즘에 빨려 들어간다."

40대 안판석 감독과 아리스토텔레서의 미메시스(모방, Mimesis)라니. 둘의 조합 자체가 개연성을 내뿜는다. 모든 예술이, 서사가 있을 법한 인간의 행동과 삶을 모방한다는 미메시스론을 탐구했을 안판석 감독은 인간과 자연이 구성한 세상과 현실을 그럴싸하게 그려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 산물이 <아줌마>와 <하얀거탑>이었고, <밀회>였으리라.

그 안판석 감독이 제대로 모방해 내려던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안 감독이 지난 12일 뇌출혈로 투병 중이던 와중에 향년 64세 일기로 별세한 것이다. 60대에 접어들어서도 연이어 세 작품을 연출하며 활동에 매진해왔기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촬영과 편집을 모두 마치고 올가을 방송 예정이던 ENA <연애 박사>가 그의 유작이 됐다. 부고를 전한 제작진도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고, <하얀거탑>을 함께했던 배우 김명민 등 안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선후배 동료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실에 입각한 드라마 강조했던 PD

 '하얀거탑',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을 만든 안판석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65세. 12일 방송계에 따르면 안 감독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이날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해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모습. 2026.8.12
'하얀거탑',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을 만든 안판석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65세. 12일 방송계에 따르면 안 감독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이날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해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모습. 2026.8.12 연합뉴스

안판석 감독이 드라마 PD로 수련을 거친 시대는 말 그대로 드라마 황금기였고, 그가 1987년 입사한 MBC는 드라마 왕국이라 불렸다. 안 감독은 단막극 <베스트극장>을 통해 실력을 쌓았고, 그때 그 시절 흔치 않은 작가주의 감독으로 손꼽힌 황인뢰 감독의 <고개숙인 남자>(1991) 조연출을 거쳤다.

또 그 시절은 문학과 소설의 시대기도 했다. 영문학도 출신인 안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리얼리즘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드라마화해 주목받았다. 이후 일요일 아침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시절 김혜수 주연의 <짝>, 주말 드라마 <예스터데이>와 <장미와 콩나물>을 거쳐 문제작 <아줌마>를 내놓기에 이른다.

이른바 '장진구 신드롬'을 불러왔던 <아줌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안판석 월드' 1호 작품이다. 불륜이란 소재를 넘어서는 시의적절한 시대반영과 여성 인권이란 주제의식을 코믹한 서사에 녹였으며, 원미경과 강우석, 심혜진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로부터 6년 후 <하얀거탑>으로 안판석 감독은 또 한 번 도약했다. 일본 드라마보다 동명 원작 소설을 참고했다는 안 감독은 욕망이 판치는 의학 드라마를 통해 김명민(장준혁 역)이란 배우를 스타로 만들었고, 조단역에 머물던 고 이선균을 발굴했다.

작가주의와 장르물, 그리고 사회 반영 멜로 드라마

실패도 맛봤다.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통해서였다. <아줌마> 이후 주말 드라마 등을 거친 안 감독은 야심 차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남북과 통일 소재를 멜로 드라마로 푼 <국경의 남쪽>(2006)은 준수한 제작비와 한참 주가를 올리던 차승원을 주연으로 삼았으나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리고는 긴 절치부심. 영화 실패 이후 드라마 <아내의 자격>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6년이 걸렸다(2012년). 종편 출범 이후 JTBC 최고 화제작이었던 <아내의 자격>은 지금은 친숙해진 '강남 교육열' 소재 드라마의 원조격이었다.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인해 JTBC는 이후 드라마 제작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JTBC 월화드라마 <밀회> 촬영 스케치 장면.
JTBC 월화드라마 <밀회> 촬영 스케치 장면.JTBC

개인적으로, 안판석 월드의 정점은 <밀회>와 <풍문으로 들었소> 두 편을 꼽는 편이다. 예술대학 내 부조리와 촘촘해서 더 역겨운 갑을관계의 비인간성을 조망한 <밀회>는 순수한 사랑의 주체이자 스무 살 차이 나는 커플을 김희애와 유아인이 연기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 사랑이야말로, 예술이야말로 비인간성이 판치는 세상을 버텨낼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인간적이면서도 도발적이었다.

안판석 월드의 블랙코미디를 최대한 밀어붙인 <풍문으로 들었소>는 대한민국 법조계를 파헤치는 야심작이었다. 이 작품 속 대형 로펌을 운영하는 한인상 일가는 대한민국 법 위에 군림하고 정치까지 움직인다. 이들과 대척점에 선 '서봄' 가족이 혼전 임신과 결혼 스캔들로 얽히면서 벌어지는 일대 소동극인 <풍문으로 들었소>는 '세대론'에 천착해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엿보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성주 작가와 완성한 '안판석 월드'

<장미와 콩나물>을 시작으로 <아줌마>와 <아내의 자격>, 그리고 <밀회>와 <풍문으로 들었소>를 함께한 정성주 작가는 '안판석 월드'의 일등공신이자 그 세계를 함께 완성한 든든한 파트너였다는 평가다. 작가와 감독 모두 동시대 어른으로서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시각을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과 공유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안판석 감독은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멜로 드라마의 거장이라 부를 만하다. 남녀의 사랑만이 아닌 일종의 가족극과 세태극을 내포하는 멜로 드라마는 종종 계층 갈등의 장이자 '성정치학'의 텍스트로 기능해 왔다.

안 감독이 정 작가와 헤어진 후 작업한 <밥 잘 사는 주는 예쁜 누나>나 <봄밤> 역시 이러한 자장 아래 자리한 작품이다. 재벌 3세나 전문직이 아닌 평범한 2030 세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해도 계층 갈등과 직장 내 여성 처우 등등 안 감독 특유의 시대와 현실 반영하는 작품 톤은 변할 리 없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유작이 된 <연애박사>는 여전히 청년 세대와 그들의 사랑을 통해 가능성을 꿈꾸려는 '안판석 월드'의 최신작이었다. <아줌마>로부터 25년이 훌쩍 넘도록 한 우물을 판 안판석 감독. 그의 작품을 통해 울고 웃었고 많이 배웠음을 고백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안판석 밀회 하얀거탑 드라마 아내의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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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니스트 및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전 FLIM2.0,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