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만에 재방영된 MBC <하얀거탑>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정치적 드라마다.
MBC
대표작으로 꼽히는 <하얀거탑>은 안판석 감독의 연출 커리어 전후반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꼽힌다. 일본 동명 소설과 드라마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한 <하얀거탑>은 대학병원을 배경으로 한 의학 드라마로 보였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 의료계 내부 관료조직의 암투를 그려낸 사실상의 정치극이자 법정 드라마였다.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 중 드물게 남성들의 어두운 세계와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주연 배우인 김명민은 <하얀거탑>을 통하여 국내 최고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고, 안판석 감독은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TV 부문 연출상을 받았다.
<하얀거탑>을 기점으로 안판석 감독은 통속극 전문의 틀을 벗어나 보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장르를 넘나들며 한층 깊어진 작가적 성향을 드러냈다. 장르적으로 구분하면 여전히 로맨스물의 비중이 높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안 감독은 특정한 직업군이나 환경에 속한 사람들의 세계를 최대한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가 인간 개인의 본성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주목했다.
안 감독의 또 다른 후반기 걸작 중 하나인 <밀회>는 스무 살 차 연상연하 커플의 멜로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다. 동시에 소외된 비주류 청년의 성장드라마이자, 예술계의 엘리트주의와 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온 서민 여성의 이야기를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풀어냈다. 상류층과 서민을 불문하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배금주의와 속물성을 입체적으로 풍자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연상녀 연하남 판타지를 정확하게 포착하며 드라마 제목 자체가 사회적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봄밤>은 서정적인 로맨스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연대와 치유를 담아냈다.
<졸업>에서는 입시 학원을 배경으로 한 사제간의 로맨스물이라는 외피 이면에 사라진 문학과 교육의 가치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제2의 하얀거탑'으로 불린 <협상의 기술>은 M&A(기업 매수·합병) 세계를 파고들어 조직 사회에서의 암투와 생존 논리를 냉철하게 조명했다.
결국 이러한 안판석 감독의 방대한 드라마 세계관을 일관되게 관통해 온 주제는 '그래서 인간은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안 감독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주인공이라고 해서 반드시 선하거나 호감형은 아니었다. 대부분 입체적이고 모순적인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는 곧 안판석 감독이 바라보는 인간관이기도 했다.
안판석 표 드라마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만만치 않은 세상 속에서 성공을 위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뤘다.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느냐보다는 인물들이 겪는 과정에 더 주목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안판석 감독은 처음부터 관념적인 메시지를 정해두고 인물을 도구화하여 선악을 판단하거나, 시청자를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다. 드라마는 그들의 인생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일정한 시기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일단 멈추는' 식으로 이후의 미래나 평가에 대해서는 시청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로 남겨 놓는 경우가 많았다.
안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드라마는 대중성이 가장 중요하며, 내가 연출한 작품은 모두 대박 날 것 같아서 만든 것"이라면서 자신의 드라마가 특정한 사회적 메시지로 주목받는 것에 조심스러워했다.
안판석의 연출 철학
▲협상의 기술JTBC
그는 이른바 '극사실주의' 연출 기법으로 유명하다. 평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자신의 연출 지침으로 삼았다고 밝힌 안 감독은, 스토리텔링의 본질인 개연성을 극대화하는 특유의 연출 철학을 강조했다. 대사 한마디, 인물 한 명마다 이유를 부여하고, 한 회의 문맥을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문학적 구성 방식을 통해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안 감독은 <협상의 기술> 인터뷰 당시 "모든 드라마는 사실에 입각해 연출해야 한다. 비현실적인 스토리라도 정말 디테일하게 풀어놓으면, 역설적으로 현실적이게 된다"고 언급했다. 이어 "모든 드라마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면서 저마다 '착하게 살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건 드라마가 우리네 삶을 반영한 문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문학이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안판석 표 드라마의 핵심 인기 비결은 가장 대중적인 장르와 재미를 출구 삼아 들어가, 우리 삶의 생생한 속살과 인간의 본성을 가장 품위 있고 개연성 있게 펼쳐 놓는 능력이다. 이러한 연출 기법은, 허구의 드라마와 캐릭터들이라도 마치 현실 어딘가에서 실존하고 있을 듯한 생동감을 부여하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았다.
또한 안 감독은 부드러운 인품으로 배우와 현장 스태프 모두를 아우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이 오늘날처럼 선진화되기 훨씬 전부터 안 감독은 최대한 완벽한 콘티를 바탕으로 필요한 컷만 정확히 촬영하고, 배우와 스태프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한 연출가로 유명했다. 구체적인 지시로 배우를 틀에 가두기보다는, 인물로서 존재하는 자유를 부여하는 연출 방식으로 배우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최대한 끌어낼 줄 아는 연출자이기도 했다.
안판석 감독이 남긴 유작은 오는 10월 첫 방송을 앞둔 ENA 새 월화드라마 <연애박사>다.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박사과정생(추영우)과 진로를 잃은 석사과정생(김소현)이 서로를 통해 성장하는 로맨스 이야기다. 안 감독은 투병 중에도 끝까지 연출을 맡으며 모든 촬영과 편집 등 후반 작업까지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겉모습에 치중한 판타지가 아닌 진짜 우리네 삶의 공기를 카메라에 담아냈던 안판석 감독의 통찰력 있는 시선은, 앞으로도 한국 드라마가 본받아야 할 소중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다. 13일 장례 절차를 시작해 15일 오전 9시 30분 발인한다.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