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를 유독 애정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그는 어리다. 나이만 말하는 게 아니다. 성숙을 앞둔 자리에서 미숙함과 가능성을 함께 쥐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히어로들을 보자. 천재 과학자이면서 군수 시장의 정점을 찍은 사업가, 최정예 군인, 유능한 스파이, 심지어 왕족까지 있다. 히어로로서의 엄청난 능력을 빼고 보아도 주변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스파이더맨만 만만하다. 내 아들 같고 조카 같고 동생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러러보는 대신 곁에 서서 응원한다. 그가 넘어지고 다시 서는 동안 각자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그 곁에 서기가 가장 어려운 순간을 보여준다. 4년 전 피터 파커(톰 홀랜드 분)는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세상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자신을 지워 달라고 청했다. 자기만 사라지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연인 MJ(젠데이아 분)도, 절친 네드(제이콥 배덜런 분)도 그를 잊었다.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인지는 MJ와 네드의 집들이 장면에 나온다. 피터는 MJ와 네드의 새집에 간다. 그 집에는 스파이더맨에 열광하는 네드도 있고, 새 연인이 생긴 MJ도 있다. 두 사람 모두 그를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한다. 4년 전 그가 바란 대로다.
이 영화는 힘을 얻은 소년의 성공담이 아니다. 위험한 것을 자꾸 떼어내다가 결국 자기 자신까지 떼어내 버린 청년의 이야기다. 그래서 보는 내내 요즘의 20대와 내 스무 살 무렵이 떠올랐다.
잘 작동하던 4년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모두에게 잊혀진 4년 동안 피터는 온종일 뉴욕의 범죄를 처리하는 데만 매달린다. 뉴욕의 범죄율은 최저치를 찍고, 시민들은 영웅 스파이더맨을 연호한다. 지표는 완벽하다. 단지 가면 속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뿐이다.
피터는 이 고립을 실패라 생각하지 않는다. 잃을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위험해지지 않는다. 4년 전의 계산이었고 실제로 잘 작동했다. 사람을 만나도 아무도 그를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만 계산에서 빠져 있었다.
서랍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다. MJ에게 쓴 것이다.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요'로 시작하는 편지가 4년째 서랍 안에 갇혀 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피터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 거미 DNA의 호르몬이 급증하면서 두통이 심해지고 눈이 검게 물들며 제어할 수 없는 폭력성이 올라온다. 기계식 웹슈터 없이 손목 피부를 뚫고 생체 거미줄이 솟구친다.
피터가 찾은 해법은 억제기이다.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 분)를 찾아가 조언을 얻어 만든, 폭주하는 출력을 눌러 두는 장치다. 위험한 것을 떼어내 따로 두는 방식이다. 4년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자기를 떼어냈고, 이번에는 자기 몸에서 힘을 떼어낸다.
떼어내는 사람들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그런 피터 앞에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 분)가 나타난다. 진은 남의 정신에 들어가 그 사람의 몸을 대신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자다. 몸을 빼앗긴 사람은 그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인물이 피터의 집을 몰래 습격해 서랍 속 편지를 찾아낸다. 그렇게 스파이더맨의 본명과 그가 MJ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4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 종이 한 장으로 새어 나간다.
진이 초능력자 관리 기관 데미지 컨트롤을 습격하는 이유는 언니 세라를 찾기 위해서다. 세라는 초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붙들려 연구 대상이 됐다. 진은 언니가 아직 그곳에 있다고 믿었다. 기관은 세라의 위험한 힘을 통제하며 유익하게 쓰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진의 폭력이 정당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해법이 모두 같은 모양이라는 건 분명해진다. 기관은 세라를 사회에서 떼어내 가두고, 진은 남의 정신을 떼어내 자신이 채우고, 피터는 자기 안의 힘을 떼어내 눌러 둔다. 무게도 성격도 다르지만 발상은 하나다. 위험한 것은 떼어 두면 된다는 것.
억제기의 한계는 싸움 중에 드러난다. 진에게 정신을 빼앗겨 조종당한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해 피터에게 달려든 것이다. 억제기를 찬 채로 헐크를 당해낼 수 없게 된 피터는 몸에 붙은 억제기를 뜯어낸다. 눌러 두었던 힘을 전부 꺼내 쓰기로 한 것이다.
이어 위험한 걸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한 프랭크 캐슬(퍼니셔, 존 번탈 분)이 진을 향해 총을 쏜다. 피터는 총구와 진 사이로 몸을 던져 방금 전까지 적으로 마주 섰던 상대를 위해 총탄을 맞는다. 4년 전, 주위 친구들의 위험을 없애려 자신을 지운 사람이 지금은 위험과 사람 사이에 자기를 놓았다.
영화의 마지막, 피터는 골목 상점에서 우연히 옛 친구 네드와 마주친다. 피터는 그를 피하지 않는다. 먼저 이름을 말하고 손을 내민다. 기억이 지워진 네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엉겁결에 예전에 둘만 하던 요란한 악수를 하고는 갸웃거리며 지나쳐 간다.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도 4년 전과는 다르다. 그때의 피터는 위험해질까 봐 스스로 물러났고, 지금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 상대 앞에 선다.
안전한 거리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소니픽처스코리아
버거운 관계는 정리하고, 피곤한 사람은 거리를 두는 시대다. 이 처세에는 이름도 여럿 붙어 있다. 손절, 거리 두기, 현명한 선택 등이다.
나 역시 '짐이 되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피해 다닌 시절이 있다. 20대 초반, 용돈이 마른 때,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친구들은 내 형편을 알고 내 몫까지 대신 내며 자리를 지켜 주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견디기 어려웠다.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남에게 짐을 지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혼자가 편해졌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업 준비에 매달리며 그렇게 모두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다 몸에 탈이 나 입원했다. 센 진통제를 맞고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혼자 앓고 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왔다. 안부를 묻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통증이 가라앉았다. 몸과 마음의 짐이 한꺼번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20대에게 선택지가 넓지 않다는 것도 안다. 사람을 만나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못 만나는 것과, 안 만나기로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둘을 같은 말로 생각했다. 철들었다고 착각했다.
피터의 4년도 실패는 아니었다. 뉴욕의 범죄율은 내려갔고 그가 지키려던 사람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계산은 맞았다. 다만 그 4년 동안 그의 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피터가 마지막에 한 일도 대단하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할 사람에게 이름을 말했을 뿐이다. 혼자 있으면 안전하다. 다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서는 통증도 혼자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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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보다가 스무 살의 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