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을까. 가족은 나를 기억하고, 친구는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기억도 있고, 반대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사람의 존재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수많은 조각 중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마지막에서 피터(톰 홀랜드)는 그런 선택을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MJ(젠데이아 콜먼)도, 네드(제이콥 배덜런)도 피터를 기억하지 못한다. 새롭게 개봉한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그 선택 이후 홀로 남겨진 피터 파커를 바라본다.
그동안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계속 성장해왔다. 처음에는 아이언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소년이었고, 점점 자신의 힘이 가진 책임을 알아가는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그는 처음으로 완전히 혼자가 된다.
[첫 번째 감정] 피터의 외로움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장면
소니픽처스코리아
피터 파커는 이제 혼자다. 엄밀히 말하면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는 혼자가 아니다. 뉴욕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영웅을 알고 있고, 그가 도시를 구할 때마다 환호한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는 순간 아무도 피터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점점 피터 파커로 살아가기보다 스파이더맨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늘린다.
그 모습이 꽤 서글프게 느껴진다. 이전의 피터에게 스파이더맨은 갑작스럽게 얻은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가 피터에게 도피처처럼 보인다.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범죄자를 잡으면 된다. 하지만 가면을 벗으면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텅 빈 일상이다. 특히 MJ와 네드가 자신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피터의 얼굴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슬픈 부분 중 하나다. 자신은 그들과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만, 두 사람에게 피터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꽤나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 기억들은 그저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의 피터를 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혼자서 자신의 존재를 완성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한다. 누군가에게 친구이고, 누군가에게 연인이며, 누군가에게 가족이 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런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피터에게 남은 것은 스파이더맨과 외로움 뿐이다.
[두 번째 감정] 피터의 억눌림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장면
소니픽처스코리아
이번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피터의 몸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이다. 감각은 더 예민해지고, 힘은 강해지며, 몸에서는 직접 거미줄까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파워업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피터가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육체를 통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힘은 강해졌지만 통제하기 어려워지고, 폭력성 역시 이전보다 강해진다.
그 변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피터가 점점 인간보다 거미의 능력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파커로 살아가는 시간을 포기하고 스파이더맨으로만 살아가는 삶의 모습처럼, 몸마저 그 선택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만 해야하는 피터의 심적 고민이 일종의 성장을 강제로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터가 자신의 변화를 억제하려는 모습은 단순히 능력을 통제하려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에게 계속 괜찮다고 말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혼자여도 괜찮고, MJ와 네드가 자신을 몰라도 괜찮고, 메이 숙모가 없어도 자신은 계속 스파이더맨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눌러놓은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계속 남는다.
그런 점에서 피터의 새로운 능력은 마음의 경고처럼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성장의 기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파이더맨이 강해질수록 피터 파커는 사라져간다. 그리고 영화는 피터에게 묻는다. 너는 정말 스파이더맨으로만 살아갈 수 있느냐고. 그게 이번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가 던지고 있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넌 피터인지 아니면 스파이더맨인지.
[세 번째 감정] 피터의 희망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장면소니픽처스코리아
영화 후반부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와 피터가 마주하는 순간은 꽤 중요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 비슷하다. 진 역시 자신의 힘 때문에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고, 누구보다 많은 사람의 생각과 연결될 수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지는 못한다. 그런 진을 바라보는 피터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혼자가 된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립은 누가 더 강한지를 겨루는 싸움이라기보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피터는 처음에는 진을 막아야 할 적으로 바라보지만, 그녀의 상실과 외로움을 이해하면서 달라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다시 마주하고, 메이 숙모와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잊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결국 스파이더맨의 힘은 거미줄이나 초인적인 근력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상처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볼 수 있고, 누군가를 잃어봤기 때문에 타인의 상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피터 파커라는 인간이 사라진다면 스파이더맨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결국 다시 또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고, 잃어버린 관계와 시간도 그대로 복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피터에게 과거를 돌려주기보다 상처를 안고도 다시 관계를 시작할 가능성을 남긴다. 어쩌면 매일매일의 일상란 매번 모든 것을 잊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들을 품은 채 다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피터의 진짜 희망은 바로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 시작된다.
혼자서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제목 그대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영화다. 이전 세 편이 소년 피터 파커의 성장담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성인이 된 피터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이야기다. 세상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도 그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책임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이전 MCU 스파이더맨 영화와 분위기도 꽤 다르다. 아이언맨의 그림자도 없고,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하며 벌어지는 소동도 없다. 대신 뉴욕이라는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스파이더맨 자체에 집중한다. 어쩌면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가장 전통적인 피터 파커의 모습에 가까워진 셈이다.
데스틴 대니얼 크레튼 감독은 그런 변화를 액션에서도 잘 보여준다. 특히 뉴욕을 가로지르는 웹스윙 장면들은 피터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고, 이전보다 훨씬 육체적인 스파이더맨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피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 역시 뉴욕이라는 공간을 직접 날아다니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톰 홀랜드의 연기도 이번 영화에서 인상적이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홈커밍>의 어린 피터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농담을 던지고 사람들을 구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우리가 알던 스파이더맨이지만, 가면을 벗는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 혼자 살아온 시간이 얼굴에 묻어나고, 과거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만 기억하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네 번째 솔로 영화에 와서야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완전히 자기만의 얼굴을 얻은 느낌이다. 성인이 된 피터 파커 역시 톰 홀랜드의 나이든 얼굴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영화가 더 강한 스파이더맨을 보여주면서도, 역설적으로 피터에게 이제는 약해져도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 MJ와 다시 마주하는 장면이다. 결국 MJ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터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알아낸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과거의 감정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MJ는 피터에게 지금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피터는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같은 과거를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현재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무척 아프게 다가온다.
생각해 보면 역대 스파이더맨은 늘 무언가를 잃어왔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도 그랬고,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도 그랬으며, 톰 홀랜드의 피터 역시 수많은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 피터가 마주한 상실은 조금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고, 자신과 함께했던 사연까지 알게 되었지만 그 사랑을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피터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스파이더맨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벽을 타거나 거미줄을 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상처받고도 다시 사람을 믿고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노 웨이 홈>에서 혼자가 되는 것은 피터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브랜드 뉴 데이>는 그 선택 이후에도 사람은 영원히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것만이 책임은 아니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 역시 용기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사랑했던 사람과 멀어지고, 소중했던 관계를 잃지만 그렇다고 삶까지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새로운 하루란 상처를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자신의 마음을 꺼내 보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터가 MJ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라는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여러 영화와 시리즈 속 감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단순한 이야기보다, 우리의 삶과 감정을 비추는 거울처럼 바라봅니다.
브런치에 영화 감성 리뷰와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으며,
영화 속 감정을 담은 첫 에세이집 《그럴 때, 나는 그를 떠올렸다》를 출간했습니다.
레빗구미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남긴 감정과 삶의 이야기를 오래 기록하고 있습니다. :)
공유하기
네 번째 만에 완성된 '스파이더맨'의 진짜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