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라인업뮤지컬 <그날들>
최옥화
노래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스토리
뮤지컬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2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신비로운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그 서사 위로 김광석의 노래들이 하나씩 얹힌다.
신기한 것은, 노래가 장면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장면이 노래를 완성해 준다는 점이다. 두 남자의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청춘의 다짐을 담은 노래가 흐르고, 이별을 예감한 순간에는 그리움을 눌러 담은 노래가 겹친다. 특히 두 곡을 하나로 엮어 부르는 장면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던 인물들의 마음이 한 무대 위에서 만나는 듯한 묘한 감동이 있었다.
내가 이번 공연에서 특히 감동적으로 본 것은 김광석의 명곡들이 스토리에 따라 어떻게 배치되고 재해석 되는지 볼 수 있는 음악과 장면의 구성 면에서였다. 작품에 사용된 김광석 노래는 24곡이었는데, 그중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 노래의 일부 가사와 장면을 연결해 돌이켜 본다.
<변해가네>(정학, 무영, 경호원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했지"
주인공 '정학'과 '무영'의 첫 만남과 이들이 쌓아갈 우정의 시작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도 극이 전개되면서 두 사람의 길이 달라지는 것이 <변해가네>란 노래 제목에 복선으로 깔린 듯 보였다.
<나무>와 <이등병의 편지>(정학, 무영, 앙상블)
<나무>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소…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이등병의 편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정학과 무영의 성장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두 곡을 하나로 결합한 '매쉬업(Mash-up)' 연출이 돋보인다. 1막에서는 앙상블이 <나무>를 부르는 동안 정학과 무영이 <이등병의 편지> 후렴을 얹어 부르며 인물들의 감정을 시각적·청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는 노래 가사와 "나무"의 성장을 두 사람의 창창한 앞날에 대한 해석으로 읽어도 좋겠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정학, 무영)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오직 슬픔만이 돌아오잖아…. 외로움이 친구가 된 지금도 아름다운 노랜 남아있잖아"
무영과 정학이 여인 '그녀'를 지키며 우정을 깊게 다져가는 따뜻한 장면이다. 인물에게 전하고 싶은 대사를 노래 가사가 절묘하게 대신 표현해 주고 있다.
<그날들>(정학 외)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뮤지컬 제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타이틀 노래인 <그날들>은 20년 전 한중수교 행사 당시 무영과 그녀가 사라진 사건과, 20년 후 대통령의 딸 하나와 수행 경호원이 실종된 '그날'을 동시에 상징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무영, 대식)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 같애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무영이 그녀를 향한 마음을 키워가는 장면이자, 20년 후 하나를 향한 대식의 마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출의 묘미를 잘 보여 주는 탁월한 부분으로 보인다.
<사랑이라는 이유로>(무영, 그녀)
사랑이라는 이유로 하얗게 새운 많은 밤들 / 이젠 멀어져 기억 속으로 묻혀
그녀와 무영이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감성적인 대목이다. 악보가 기호가 되는 이야기를 통해 후반부의 서사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김광석의 노래가 이렇게도 해석이 되고, 따뜻함과 경쾌함을 품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새장 속의 친구>(하나, 수지, 학생들)
"파란 하늘이 유난히 맑아서 좁은 새장을 풀려난 새처럼… 창백한 거리를 달려가고 싶어"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가출을 시도하는 대통령의 딸 하나의 상황을 경쾌하게 표현한다. 김광석 노래 중 비교적 덜 알려진 노래인데, 상황을 절묘하게 만들어 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등병의 편지>(정학, 군인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정학이 사라진 무영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다. 너무 유명한 곡이어서 어디에 어떻게 활용될까 궁금했었는데, 앞서 매쉬업 곡에 이어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나의 노래>(무영, 운영관, 경호원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무영이 그녀를 향한 사랑의 기쁨을 경쾌한 안무와 함께 에너지 넘치게 표현하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극이 끝나고 배우 전체가 등장하여 커튼콜 인사 후 관객들과 함께 부르는 앙코르 곡이기도 하다. 그동안 막연하게 김광석 노래는 슬프고 느린 곡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밝고 경쾌하게 재해석한 곡들이 많아서 그 점도 좋았다.
<꽃>과 <내 사람이여>(정학, 경호원들)
<꽃>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지네 눈물같이…"
<내 사람이여>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 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1막의 매쉬업에 이어 2막에서도 앙상블의 <꽃>과 정학의 <내 사람이여>가 합쳐지며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사랑했지만>(무영)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무영이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산을 폭파하기 직전 부르는 노래로, 극 중 가장 애절한 감정이 폭발하는 대목이다. 이 곡을 사랑을 위해 죽는 장면에서 사용한 것은 절묘한 선택인 것 같다.
<서른 즈음에>(정학, 운영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정학이 상실감과 허탈함에 빠져 있을 때, 운영관이 그 곁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장면이다. 작품의 전 곡 중에서 가장 새롭게 다가온 곡이다. 김광석 노래로만 감상했을 때엔 청춘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곡으로 이해했는데, 이렇게 아픈 기억을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잊힐 수 있으니 너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곡으로도 해석된다는 관점이 놀라웠다.
<흐린 가을에 편지를 써>(전원)
"비가 내리면 음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힐까…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무영을 찾아와 정학으로부터 목걸이를 전달 받고 무영의 진실과 죽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면서,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곡도 커튼 콜 후 앙코르 곡으로 모두 다 함께 부르는 곡이다. 처음에는 이 노래가 끝 곡이라는 것이 잘 이해 되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이 곡을 슬픔을 극복하고 그리운 사람에게 전하는 따뜻함의 메시지로 해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떠났지만 마지막이 슬프지 않다. 함께 부르는 앙코르 곡도 신나게 부를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관람을 마치며
▲커튼콜 장면에서 주인공 역할의 엄기준 인사뮤지컬 그날들최옥화
공연을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은, 김광석의 가사가 애초에 노래이기 이전에 한 편의 시 같다는 사실이다. 서른둘, 짧게 살다 간 그가 남긴 언어에는 청춘의 방황이나 슬픔 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조 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이토록 입체적인 이야기가 그 위에 얹힐 수 있었던 것이다. 좋은 가사는 시가 되고, 좋은 시는 결국 누군가의 삶이 된다. 평소 일상에서 무심코 들었던 김광석의 노래들이 뮤지컬이라는 극적 구조와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순간을 보는 멋진 경험이었다.
이러한 감동은 장유정 연출가의 탁월한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김광석의 가사 자체가 비유와 상징이 풍부한 '한 편의 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사에 맞춰 극을 설계하고 서사를 입힌 창작진의 상상력에도 깊은 존경을 표한다. 2013년 초연 이후 각종 시상식에서 베스트 창작 뮤지컬상, 연출상, 극본상 등 11관왕을 달성한 이유를 다시금 체감한 시간이었다.
이번 시즌에는 유준상, 엄기준, 류수영, 최진혁, 김정현(정학 역)과 오종혁, 박규원, 윤시윤, 유선호, 산들(무영 역) 등 화려한 라인업이 무대를 채운다. 서울 공연이 마무리되면 지방 투어도 진행된다고 하니, 일정을 잘 확인해서 대구 공연 때 꼭 다시 한번 관람하고 싶다. 공연장을 나온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음악과 잔상이 여운을 길게 남는다.
휴가 시즌이지만 폭염으로 여행을 주저하고 있다면, 혹은 김광석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여름엔 가족과 함께, 또는 친구와 시원한 공연장에서 마음을 꽉 채울 뮤지컬 한편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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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교사와 교장으로 걸어온 교단을 마치고 시를 쓰면서 블러그 운영 및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