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향하는 런던의 모자들"
지난 7월 25일 관람한 뮤지컬 <매드해터>에서 사람은 곧 모자다.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가사에서 이 은유는 흔들린다.
"언제쯤 나도 이곳에 살 수 있을까"
넘버 '실크로 된 탑햇'을 부르는 14살 소년 노아는 런던에 살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런던에 살 수 있길 갈망한다. 노아가 이런 역설적인 희망을 품게 된 이유는, 그에게는 런던 사람들이 쓰는 모자(탑햇)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자는 런던에 살고 있다는 일종의 성원권(membership)이자, 이곳에 살아도 된다는 허가증의 기능을 한다. 그렇기에 아직 탑햇이 없는 노아는 이곳에 살지만, 동시에 살지 않는 이상한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서두에 제시한 은유 '사람은 곧 모자'가 흔들린다. 어떤 사람은 모자가 아니다.
"나도 계속 살 수 있어, 이 런던에 / 그때 꼭 쓸 거야 실크로 된 탑햇"
소년 노아는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자신도 '실크로 된 탑햇'을 쓰고 거리를 거니는 런던의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굴뚝 청소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어느새 노아는 굴뚝 사이를 오가기엔 너무 몸이 커져 버렸다. 14살이 되어 하루 12시간씩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노아는 어느새 실직 상태가 됐다.
그런 노아가 찾아간 곳은 바로 '헥터'의 모자 공장. 이곳에서는 탑햇, 다시 말해 모두가 욕망하는 것을 만든다. 사장 헥터는 당찬 포부를 이야기한 노아를 기꺼이 고용하고, 노아는 똑같은 재료로 똑같이 생긴 모자를 만드는 산업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친다.
▲뮤지컬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공연 사진
홍컴퍼니
잘못된 '인간의 조건'
모자는 대량 생산된 욕망이다. 사람들의 욕망은 모자, 더 정확히는 모자를 구매해 쓰고 다니는 것에 집약된다. 덕분에 자본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사회 구조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대량 생산된 모자를 사람들이 구매하면 구매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자를 욕망하게 되는 순환고리가 형성된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 물건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물건의 실용적 가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는 그 사람의 계급이나 신분을 드러내는 지표로 기능한다. 그렇게 <매드해터> 속 사람들도 "모자를 써서 지위를 뽐내고, 모자를 써서 지위를 드러낸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자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지닌 사람만이 사람으로 '대접' 받는다. 설령 대접 받진 못하더라도 사람으로 '취급' 받을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모자는 살 수 없을지언정 모자를 만드는 노동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노동이란 거대한 산업 기계의 부품이 되는 것, 톱니바퀴의 톱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꺼이 톱니가 된 사람은 존중까지는 받지 못하더라도 '쓸모있는 사람' 취급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부품은 기계가 과열되면 망가지고 만다. 망가진 부품,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은 '쓸모없음' 판정을 받고 거리로 내몰린다. 그런 사람은 분명 런던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런던에 살지 않는 존재, 살 수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뮤지컬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공연 사진
홍컴퍼니
세상에 균열 낸 노아의 행진
열심히 일해서 실크로 된 탑햇을 쓰고 런던에 살겠다고 다짐하던 노아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탈락해 거리로 내몰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선배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고생하다 거리에서 쓰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제 노아의 바람은 그럴 듯한 모자를 쓰는 것에 머무를 수 없다.
노아는 쓸모없다며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쓸모없는 사람들을 위한 모자를 만들고자 한다. 그 모자는 대량 생산된 탑햇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와 각자의 사연을 반영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모자다. 이제 노아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모자를 만들고, 쓰고 행진하며, 판매한다(극 중에서 이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간다. 경계를 파악하는 건 관객 각자의 몫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욕망을 특정한 방식으로 유도하고, 끝내 특정한 틀 안에 가둔다고 주장했다. <매드해터> 속 사람들이 탑햇을 원하고, 또 탑햇으로 돈을 버는 세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런 세상에 균열을 내는 건 노아 같은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허락하고 장려하는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욕망을 쫓고 마음껏 돌아다니는 노아의 '저항'이 헥터의 세상에 균열을 냈다(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노마디즘'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매드해터>는 마냥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헥터의 세상에 분명 균열이 생겼지만, 노아에게도 분명 상처가 생겼다. 모자를 만들고 쓰고 행진하던 노아의 동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노아를 향해 미쳤다며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노아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노아는 무엇을 향해 춤을 추었는가, 지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어둠이 노아를 삼킨다. 노아는 (···)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햇볕을 따라 자리를 옮기는 춤을 춘다."
왜 하필 노아는 모자를 택했을까, 극의 말미에 노아의 친구 조슬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굴뚝 청소에서 해고된 소년에겐 이게 런던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거든."
▲뮤지컬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공연 사진홍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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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소년은 왜 모자 쓰고 춤추며 행진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