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며 "잊어달라"던 남자가 4년 만에 깨달은 것

[넘버링 무비 548] 영화 <스파이더 맨 : 브랜드 뉴 데이>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제가 피터 파커라서요? 그러니 새 주문을 외우세요. 이번에는 모두가 피터 파커를 잊게 해주세요."

이 영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전작인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차원 상자가 폭발하며 그 안에 봉인해 두었던 마법이 풀려나 차원이 붕괴되기 시작하며 다른 평행 세계의 빌런들이 현재의 세계로 넘어오려던 찰나다.

피터 파커(톰 홀랜드 분)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잊게 만드는 주문을 외워달라고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에게 요청한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연인과 친구를 찾아가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설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인 MJ(젠데이아 콜먼 분)의 이마에 남은 상처와 친구 네드(제이콥 배덜런 분)의 행복한 일상을 보며 자발적으로 혼자가 되고자 마음먹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가족과 친구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이하 브랜드 뉴 데이)는 혼자가 된 피터가 이후 4년의 시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며 시작한다. 낡고 허름한 공간에서 기거하며 거리의 범죄를 해결하는 일만으로 생의 모든 순간을 채워가고 있는 스파이더맨의 삶이다. 그 덕분에 도시의 범죄율은 최저치를 기록할 수 있게 되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가지만, 정작 가면 속 이름인 '피터 파커'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욕 전체를 대표하는 영웅이자 그 어떤 관계에도 속할 수 없는 철저히 외면 받는 개인이 된다.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소니픽처스코리아

02.
그런 스파이더맨 앞에 새로운 빌런인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 분)가 등장한다. 타인의 정신과 육체를 점유하고 옮겨가며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거리낌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유일하게 피터만이 그의 정신 감응 공격으로부터 자유롭고 그 존재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매 순간 얼굴을 바꾸며 정체를 감추는 그는 정체불명의 위협이 된다.

한편, 데미지 컨트롤의 책임자인 빌 메츠거 국장(트라멜 틸먼 분)은 피터에게 진을 위험한 범죄자로 소개하며, 그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중요하고도 위험한 무언가를 탈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피터 역시 자신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통제력을 잃게 될 때 어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에 의심하지 못한다.

중요한 건 이 영화에서 진의 위치가 단순히 빌런의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피터와 진 두 사람은 상황(능력)적으로도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놓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잊히려 한 스파이더맨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의 신체와 정신을 점유하는 진 그레이다.

03.
"우리 같은 사람은 평범하게 살 수 없어. 가족이나 친구도 모두 사치야."

사실 진 그레이가 데미지 컨트롤을 습격하는 이유는 언니 세라 그레이(올리비아 부스포드 분)를 구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이 그 능력을 얻고 활용하기 위해 진과 같은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세라를 납치한 뒤 고문하고 연구하고자 했던 자들(영화 초반부에서 이를 뒷받침하려는 듯 데미지 컨트롤의 존재 이유로 파괴적인 힘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법을 찾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피터와 진, 두 인물의 행동이나 목적은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정의의 측면에서도 완전히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잃거나 빼앗길 존재가 있다는 것이며, 그런 상황을 악용하여 약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적 역시 마주하게 된다는 현실을 두 사람 모두 함께 마주한다. 그 결과,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런 존재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고독을 원해서가 아닌, 감정과 상실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하나 더 있다. 인간들 틈에서 함께 살아가고, 그들과 감정을 교류하고 있지만, 결국 초능력자라는 존재, 영웅(빌런)이라는 존재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시선이다. 이 문제는 이번 작품에서만 내세워졌던 부분은 아니다. 히어로라면 누구나 그 간극에 대한 고민을 공유해왔다.

다만 이번에는 그 지점이 '섣불리 마음을 내주고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메츠거 국장을 비롯한 데미지 컨트롤 집단이 초능력자들의 힘을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며 필요할 경우 그 능력을 일종의 자원처럼 여겨왔던 부분이 크게 작용한다. 진 그레이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존재로 취급되고 관리되는 현실이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고립시키는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다.

스파이더맨의 성장통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소니픽처스코리아

04.
물론 두 사람 차이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파커는 4년 전, 그러니까 전작인 <노 웨이 홈>의 후반부에서 그런 선택을 하며 이후의 시간을 홀로 보내왔고, 진 그레이는 이제 막 언니를 잃었다. 이 차이는 영화가 피터로 하여금 일종의 성장을 강요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는데, 심리적 충격으로 고치와도 같은 거미줄 더미에서 잠이 깬 그가 거미 DNA 활성화를 마주하게 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실제 성충이 되기 위한 거미의 탈피 과정처럼도 보이는 이 변화를 두고 피터 본인은 자신의 신체에 나타나는 이상 증세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을 예고하는 성장통의 징후처럼도 보인다.

그 과정에서 거미와 인간 DNA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해 폭력적인 모습이 되기도 하고, 기계식 웹슈터가 아닌 생체 거미줄로의 변화와 같은 신체적 변화도 일어난다. 이것이 의미는 이제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 두 정체성을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작 <노 웨이 홈>까지의 피터가 힘과 책임을 배워가는 소년이었다면,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는 그 힘을 자신의 삶 전체와 어떻게 통합해 나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된다는 건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며, 개인이 가진 힘의 한계와 취약함을 인정하고 다른 존재와 함께 나누고 합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피터는 조금 먼저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 분)와 프랭크(존 번탈 분)는 피터의 성장과 고독이 어떤 모양이 될 수 있을지 미리 보여주는 또 다른 두 개의 미래가 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이 타인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 억제하며 그 힘을 내면에 감추려 한 헐크. 그리고 가족을 잃은 뒤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처벌을 내리기라도 하는 듯 자신의 모든 삶을 임무로만 채워 넣는 프랭크. 피터는 두 사람의 삶으로부터 도움받는 한편, 이미 그런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05.
"나도 해보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안 돼."

피터 파커도 스파이더맨도 모두 자신임을 선언하며 괴로워하는 진에게 피터가 전하는 이 말 속에는 두 인물 사이에 놓인 4년의 시간이 모두 담겨 있다.

연인 MJ와 친구 네드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숙모 메이를 잃은 슬픔을 홀로 간직했으며, 피터를 버리고 스파이더맨으로만 시간을 보냈던 날들. 다시는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누구도 가까이 두지 않고, 타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외로움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던 날들. 그러니까 이 말 속에는 단순히 위로가 아니라 이미 혼자의 힘으로 어른이 되어보려 한 존재가 발견한 한계가 담겨 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MJ의 말처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혼자가 되고자 했던 결심은 '관계'를 형성하는 또 다른 이들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 반쪽짜리 해결책이었을 뿐이다.

신체의 변화 앞에서도 억제할 방법만을 찾았던 것, 메츠거 국장의 주장만 믿고 진을 위협으로 오해했던 것 모두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언니 세라를 잃은 진이 메츠거를 죽이는 일밖에 하지 못할 때 스파이더맨은 조금이나마 먼저 성장한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비춰주고자 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지만, 큰 책임이 의미하는 바가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영화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소니픽처스코리아

06.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피터와 네드는 과거 두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던 때 나눴던 핸드셰이킹을 반사적으로 해낸다.

<노 웨이 홈>에서의 피터의 결정이 낳은 여파로 네드는 여전히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말이다. 브랜드 뉴 데이, 이제 새로운 날이지만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피터가 잃었던 시간과 모든 관계를 되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터는 이제 더 이상 MJ와 네드,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을 먼발치에서 자신을 숨긴 채 홀로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관계는 그렇게 시작된다. 기억할 수 없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진 역시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런 피터를 닮아갈 것이다. 고립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나아갈 수 없음을 그가 알려줬으니까. 이 작품이 그랬듯, 다음 시리즈가 이번 영화의 마지막에서 시작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혼자가 아닌 함께인 이들의 모습이 그려지게 될 게 분명하다.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뉴데이 톰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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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