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설을 기다렸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를 기억하며

[김성호의 씨네만세 1399] 한국 영화와 연극으로 만난 그의 작품들

너무 이른 이별이다. 일본 추리소설 대부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난 23일 새벽 숨졌다는 소식이다. 사인은 대장암, 향년 68세였다. 매년 한두 작품은 꾸준히 발표해온 왕성한 작가였다. 책 100권을 내는 감당키 어려운 목표를 그는 벌써 수년이나 전에 이루었던 터다.

타 작가에 비해서도 어찌나 많은 작품을 쏟아냈던지 팬들 사이에선 히가시노 게이고가 한 명의 작가가 아니라 글쟁이 여럿으로 이뤄진 프로젝트팀이라는 소문이 자못 진지하게 돌았을 정도였다. 최근까지 왕성하게 집필해 다음 달 5일 신작 <영원한 기억> 출간을 앞두고 있던 그였기에 사망 소식이 더 충격으로 다가온다.

장르문학, 그중에서도 추리문학의 거두로 꼽혀온 히가시노 게이고다. 정통 추리소설로 시작해 소위 사회파라 불리는 사회문제와 결합한 장르물, 트릭보다는 동기에 집중해 인간성에 다가서는 작품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등과 함께 일본 장르문학의 거장으로 자리한 세월이 짧지 않거니와 술술 읽히는 문장력을 바탕으로 대중과 장르문학 사이에 굳건한 신뢰를 쌓아올린 공이 크다.

용의자 X 스틸컷
용의자 X스틸컷CJ엔터테인먼트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굵직한 대표작이 그의 작품성향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내보인다. 극적 전환이 확실한 서사와 선명한 캐릭터가 특징으로, 연극과 드라마, 영화 등 매체를 바꿔 자주 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관련기사: 공항, 기차역, 버스터미널에서 인기 있는 책).

히가시노 게이고는 한국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문학 침체기가 깊어진 가운데 일어난 일류(日流) 흐름 가운데서도 그 존재감이 분명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등 일류문학의 선봉장들 사이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우뚝 서 있다.

한국에 출판된 작품만 무려 50권이 넘는데, 이중 적잖은 수가 베스트셀러를 거쳐갔다. 한국에서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한 작품도 여럿이다. 박신우의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방은진의 <용의자X>, 이정호의 <방황하는 칼날>이 모두 그의 원작을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한국영화가 된 작품들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에서 우선 눈길을 끄는 건 화려한 출연진이다. 무려 한석규, 손예진, 고수, 이민정, 박성웅이 주조연으로 나섰다. 일본에서 연극과 드라마로 연달아 제작돼 화제가 된 작품을 소설이 끝을 맺은 지 10년 만에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했다. 충무로 안에서도, 한국 소설 중에서도 영화화할 작품이 없다는 자조 속에서 일본 소설은 가장 간편한 대안이 됐다. <검은 집>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등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은 가운데,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소설의 첫 영화화가 마침내 이뤄진다.

원작 <백야행>은 장장 19년에 걸친 비극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를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빛나던 당대 일본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을 비춰내며 주목받던 중견작가이던 히가시노 게이고를 사회파 작가로서 다시금 바라보게 했다. 이를 한국 상황에 맞춰 개작한 영화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작업의 정석> <아내가 결혼했다> 등 멜로와 코미디, 드라마에 익숙하던 배우 손예진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으로, 한석규, 고수의 돋보이는 연기까지 더해지며 적어도 연기의 측면에선 볼 만한 작품이 됐다.

다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공들여 써낸 버블경제가 붕괴한 일본사회 이면의 특징이며 빛과 어둠의 교차를 상징하는 두 인물의 쓰임 등이 영화적으로 충실히 표현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남는다. 세련된 소설에 비해 각색과 연출이 다소 둔탁하고 촌스럽다는 민망함이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한국에서 충분히 영화화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용의자X>(2012)는 앞서의 실패를 충실히 검증하고 나선 작품이라 해도 좋겠다. 류승범이란 색깔 확실한 배우를 앞세웠는데, 그가 재해석한 캐릭터 석고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속 주인공에 비하여도 손색없는 존재감으로 이야기를 장악한다.

일본서 먼저 제작된 <용의자 X의 헌신>이 장르물로서의 성격에 집중했다면 <용의자X>는 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해 제목에서 빠진 '헌신'을 도리어 부각한다. 때로는 감정이 모든 것일 수 있음을 내보이는 이 영화는 원작에 매몰되지 않고 재해석하고 변주하는 작업의 미학을 엿보도록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직접 이 영화의 과감한 개작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해준 것도 그래서겠다.

방황하는 칼날 스틸컷
방황하는 칼날스틸컷CJ엔터테인먼트
<방황하는 칼날>(2014)은 원작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면서도 한국적 특색을 곳곳에서 부각한다. 소년범죄를 소재로 삼아 사회파 추리소설의 작풍을 한껏 드러낸 원작을 10여 년 만에 영화로 제작한 것부터가 한국의 사회상과 맞물린 문제제기가 가능하단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영화는 딸을 잃은 아버지가 직접 범인인 소년들을 찾아나서는 줄거리를 가졌다. 밀양집단성폭행사건 등 빈발하는 청소년 범죄에 대한 국민적 감정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처벌 사이의 격차가 부각되던 상황에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설정이었다. 극중 주인공이 그토록 쫓는 인물의 이름이 '조두식'이었다는 사실도 영화가 염두에 두고 있는 표적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한다.

영화는 원작을 얼마간 따르면서도 한국적 특성을 배합해 절충하는 편을 택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밀함을 덜어내고 대신 부서진 부성애를 부각하고자 했다. 감정선 짙은 연기에 특화된 정재영과 이성민을 캐스팅한 것도 그래서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이 상당부분 덜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소설에 비해 시간과 묘사의 제약이 큰 영화의 특성상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회적 소재를 선택하면서도 장르적으로 수준 높게 밀어가는 작가의 존재는 문학뿐 아니라 영화계에도 귀한 자산이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꼭 그러하다. 그와 같은 작가가 있어 일본 문학, 나아가 연극과 영화계는 큰 수혜를 입었다. 그리고 그를 애정한 이웃나라 한국 또한 그러했다.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

가면산장 살인사건 무대 사진
가면산장 살인사건무대 사진비컨컴퍼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영화 뿐 아니라 연극으로도 종종 만들어진다. 그 스스로가 연극을 염두에 두고 쓴다고 느껴질 만큼 공간구성부터 소품, 배경, 인물과 대화 등이 딱 맞아떨어지는 때도 잦다. 그래서일까. <용의자 X의 헌신> <가면산장 살인사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의 작품이 한국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져 관객과 만나기도 했다. 질과 양 모두에서 부족한 창작극으로 골머리를 앓던 한국 연극계에 자극이 되는 작품이었음은 물론이다.

장르문학을 천대하지 않는 일본 문학계가 이 비범한 작가를 낳았다. 순수문학이 높게 치는 장점을 얼마 갖고 있지 않은 이 작가를 일본 문학계는 기꺼이 거두었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기회를 제대로 붙들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창작열과 새로움을 거듭 시도하는 모험심이 후배 작가들에겐 그대로 나아갈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었다.

그를 그대로 따르려는 이에게도, 부수고 넘어서려 하는 이에게도 그는 고마운 존재였다. 돌아보면 한국 문학과 영화, 그리고 연극이 가장 목 말랐던 시기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가장 왕성했던 때였다. 그를 가진 일본과 갖지 못한 한국의 차이가 역력하여서 쓰고 읽는 나는 이를 몹시 부럽고 부끄럽게 여겼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머무르지 않는 작가였다. 문학도가 아닌 엔지니어 출신 작가란 배경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살려 문장과 미학에 매몰되지 않고서 설정과 소재, 시각과 캐릭터로 풀어가는 작품들을 다채롭게 구상하고 실현했다. 정통 추리극에서 출발했으나 사회파 추리소설로 그 장을 넓혔고, 개인과 사건을 넘어 일본 사회와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작품으로 관심을 넓혔다.

그 모두가 독자에게 새로움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수고이자, 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창작자의 노력이었다고 이해한다. 인간 히가시노 게이고는 죽었으나 그 문학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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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