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영화를 어떻게 탄압했나

[김성호의 씨네만세 1400] '영화와 책' <독립영화> 6호

우리는 독립이 삶과 영화의 진실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믿는다.
(중략)
우리는 영화가 사람의 욕망뿐 아니라 선의와 진심도 자극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매체라 믿는다. -27p,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선언문' 중에서

한국에 독립영화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해낸 성취와 실패 또한 실재한다면, 마땅히 그 역사를 써낼 수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지탱하고 가꾸어온 이들이 있고 앞으로도 그와 같은 작업이 이뤄지길 바란다면, 그 역사 또한 반드시 쓰여야 한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발간하는 잡지 <독립영화>가 2000년 6호를 '특별호'로 따로 내어가며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따로 정리해 기록한 것도 그러한 이유일 테다.

올해 봄부터 시작한 '<독립영화> 다시 읽기' 모임이 이달로 6회째를 맞이했다. 동료 비평가 및 감독, 영화제와 협회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23일 6회차 모임은 온라인으로 열렸다. 지금껏 함께 읽은 5권의 잡지가 출간 당시 독립영화계 주요 동향과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을 전했다면, 6호는 앞서 언급했듯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독립영화 책 표지
독립영화책 표지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가 여기에

특별호답게 따로 제목을 달고 나왔는데, 무려 '한국독립영화의 모든 것'이다. 야심 찬 제목이 얼마쯤 보여주듯이 1970년대부터 2000년에 이르는 영화사적 순간들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한국 독립영화의 주요한 순간을 개요식으로 정리해 기록한 부분, 몇몇 필자가 줄글로써 독립영화사를 따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평가한 것, 그리고 독립영화의 울타리 안에 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을 짧게나마 기록한 부분이다. 독자친화적인 글보다는 데이터베이스를 이루는 일부 기록을 제하고 나머지 대목을 이날 모임에서 나누었다.

책이 정리한 독립영화사는 1970년부터 출발한다. 1971년 20여 편의 16mm 영화를 제작하고 6차례에 걸쳐 영화제를 개최한 '영상연구회', 여성이 주축이 돼 영상연구회로부터 파생돼 나온 '카이드 클럽', 작품 제작보다도 영화감상과 토론에 열중했던 '영상미학반', 하길종과 김호선 등 이름 있는 감독이 주축이 돼 동명 계간지를 발간한 '영상시대', 독일문화원 원장 비스마르크가 한국 영화인들과 접촉해 창립한 1970년 최대 규모 영화모임 '동서영화동우회' 등 여기저기서 제 단체가 결성돼 각자의 영역을 구축한 것이 1970년대다.

독립영화가 대체로 미학적 가치를 중심으로 논의되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에 이르면 영화의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난다. '영화로 운동을 한다'는 기치를 내건 서울영화집단의 실험적 작품 <판놀이 아리랑>과 같은 실험적 다큐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영화가 해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자본이 장악한 배급과 상영에 대한 고민은 영화제의 태동으로 이어진다. 1984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라 이름 붙은 제1회 작은영화제가 개최돼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제작할 수 있는 8mm와 16mm 필름으로 찍은 제도권 바깥의 작품들이 한 자리서 상영된 건 개중에서도 주목할 사건이다. 이에 참여한 젊은 영화인들이 각자의 학교에서 학내 영화서클을 만들기 시작한 게 1985년 4월부터였는데, 지금도 존재하는 많은 영화동아리가 이때 창설된 게 그 때문이겠다.

영화로 사회적 가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당시 신군부 세력에겐 적잖은 위협으로 작용했다. 3S로 대변되는 문화정책이 주류 상업영화에 있어선 효과를 발했으나 저변에서 제작되는 작은 영화에까지는 힘을 미칠 수 없어서다. 1986년 11월 서울영상집단의 <파랑새>, 연세대 총학생회의 <부활하는 산하>를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작품으로 간주해 제작자를 구속한 사건이 본격적인 탄압의 출발점이 됐다.

국가가 탄압한 영화, 영화가 이룩한 성취

검열과 탄압에도 민족영화와 저항영화의 흐름은 지속됐다. 1988년 홈비디오를 갖고 판잣집 강제 철거촌에 들어가 수년에 걸쳐 찍은 <상계동 올림픽>은 한국 다큐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았다. 장산곶매, 민족영화연구소, 노동자뉴스제작단 등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집단들이 <오! 꿈의 나라> <노동자뉴스 1호> 등을 제작한 것도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관련기사: 언론이 할 일 안 해서 직접 찍은 영화... 지금은 얼마나 다를까 https://omn.kr/2j23g).

금기였던 1980년 광주를 영화 안에 담거나 당대 기성언론이 외면하고 심지어는 적극 왜곡하기까지 한 노동탄압의 진면목을 영화란 매체를 통해 전하는 게 이들의 작업이었다. 1990년 제작된 장산곶매의 두 번째 장편 <파업전야>는 한국 독립영화가 이룬 당대의 성취라 부를 만한 작품으로, 파급력과 화제성 면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전국 대학교를 돌며 순회상영하는 이 영화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가 전경을 캠퍼스 안에 출동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대학생들이 이에 저항하며 수십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을 모았다고 전한다.

저항영화에 대한 정부의 공격적 대처는 이즈음 정점에 이르렀다. 1990년 4개 대학이 공동제작한 <어머니, 당신의 아들> 시사회장에 경찰이 난입해 필름을 압수하고, 영화법 위반 혐의로 제작자를 기소해 처벌하는 사태가 빚어진 일도 있었다.

1980년 광주를 다룬 <황무지>에 대해 공연법 위반 혐의로 제작자를 기소했고, 역시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한 <칸트씨의 발표회>에 대해서도 상영중지 공문이 발송되는 일이 잇따랐다. 이 작품들뿐 아니다. 10여 년간 독립영화 제작자들은 창작과 상영이 기소와 선고, 항소와 재심청구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과 싸워야 했다.

사전 심의제와 등급제 또한 독립영화가 마주한 벽이었다. 영화에 대해 국가기관의 사전심의를 법제화하고 이를 받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매기는 구태의연한 법령이 1990년대 말까지도 엄연히 작동하고 있었다. 이를 빌미로 독립영화 제작자 및 영화제 관계자를 불법으로 몰아 처벌하는 방식이 공공연했다. 1997년 홍익대서 열린 제2회 인권영화제는 사전심의를 받았단 심의필증 없이 행사를 진행한 결과로 단전 조치를 당했고, 영화제 집행부 3명이 경찰에 구속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 영화제서 상영된 <레드 헌트>에 대해선 국가보안법 위반 딱지가 붙었고 제작자가 구속당하는 일이 빚어졌다.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도 한국 독립영화는 거듭 나아갔다. 저항과 민중영화를 일구던 진영을 벗어난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해 주목할 만한 작업을 발표했다.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수상하며 대중을 놀라게 했고, 변영주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른바 <낮은 목소리> 연작이 한국을 넘어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다.

국가 영화산업 담당 조직인 영화진흥위원회가 본격 출범하고, 독립영화계에서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첫 발을 딛고 입법과정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16mm와 8mm를 넘어 비디오, 나아가 디지털로 영화 제작 환경 또한 변화했다. <독립영화> 6호는 이처럼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독립영화란 울타리를 세우고 지켜온 이들, 이를 무너뜨리려는 공작과 탄압들, 그사이 이룩해낸 성취의 기록이다.

독립영화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선언문
독립영화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선언문한국독립영화협회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하긴 쉽지가 않다. 책 가운데 실린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선언문도 '독립영화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으로 출발한다. '검열을 거부하고 자본을 적게 쓰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이내 '그 무엇을 위한' 일일 때 '그 의미가 완성된다'는 답으로 귀결된다. 때로는 구태의연한 영화형식과 작업방식, 혹은 매체에 저항하고, 또 때로는 작가의 창작정신을 훼손하는 상업적 자본이나 권력의 외압에 맞서는 것이 독립일 수 있겠다.

한국 독립영화는 창작의 순수함을 훼손하는 압제에 저항해온 역사를 가졌다. 군사독재정권의 노골적 탄압은 이후에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기준 없는 영화제 및 각종 독립영화 행사비 삭감 등으로 이어졌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기록한 다큐감독이 극우유튜브나 다름없이 국가에 의해 법의 심판대에 올라서고 유죄판결을 받는 일도 벌어진다. 제작자에 의해 제가 현장서 감독으로 찍은 영화의 연출자 자격을 잃게 되는 일 또한 빚어진다.

무엇보다 더 자극적인 것만 우대받는 시대적 흐름에 의해 더 가치 있는 것을 좇는, 혹은 더 다양한 것을 담아내려는 시도들이 마땅한 조명을 받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오늘의 독립영화가 저항할 것은 이처럼 끝나지 않는다. 아마도 독립영화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테다.

<독립영화> 6호로부터 다시 26년의 시간이 흘렀다. 인제 와 한국 독립영화 역사를 새로 쓴다면 무슨 이야기가, 어떤 작품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선언문을 새로이 작성한다면 또한 어떤 선언이 들어갈 수 있을까. 오늘의 작가와 영화인, 나아가 영화팬들이 고민해 볼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선 오늘이 시간과 공간의 좌표 가운데 동떨어진 섬이 아니고, 우리가 만나는 독립영화가 지난 시대 사람들의 성취와 실패의 결과물인 때문이다. 2026년 오늘,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기록하고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립영화> 6호는 지자체 도서관이 무료 지원하는 디비피아를 통해 온라인으로, 국회도서관과 한국영상자료원 등 일부 기관에서 실물로 만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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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