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개봉 이후, 왜들 그렇게 조급한가

영화가 들이민 '배타성', 스크린 밖에서도 보여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Hope)는 낯선 타자를 향한 배척이 집단적 광기로 번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는 전작 <곡성>이 던진 화두의 연장선에 있다. <곡성>의 비극이 외지인을 향한 의심과 배척에서 출발했다면, <호프>의 비극은 숲에 불시착한 미지의 외계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낯선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를 떠올릴 때, 억울하게 공격받는 인간의 생존 투쟁을 상상한다. 그러나 <호프>가 들이민 팩트는 정반대다. 양배가 어린 외계인(칼리)을 쏴 죽인 비극의 시작은 두려움이 아닌, 그저 시체를 "80만 원에 팔아먹기 위해서"였다.

두려움이라는 변명조차 사치인, 인간의 얄팍한 탐욕이 계기였던 것이다. 반면 외계인들은 달랐다. 황후 '조르'는 숲에서 사냥꾼들을 마주치자 먼저 외계어로 대화를 시도했고, 전사 '마베이요' 역시 성기가 욕설을 퍼붓고 총을 쏘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었다.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외계인과 인간의 차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미지의 공포에 짓눌린 인간이 맹목적인 적대감을 드러낼 때, 외계인은 역설적이게도 생명을 구하려 애쓴다. 마을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긴 반면, 외계인 전사 마베이요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기꺼이 뽑아 든다.

심지어 황제 '쿠얼'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며 인간의 성경(히브리서 11장)을 읊조린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인간과 오히려 숭고한 희생을 보여준 외계인. 미지의 존재를 향한 얄팍한 편견은 물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마저 완벽하게 박살 나는 순간이다.

영화 속 배척, 현실의 댓글창으로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의 광기에는 이상한 이중잣대가 숨어 있다. 낯선 외계 존재에게는 최소한의 확인도 없이 총부터 쏘면서, 정작 마을의 해술 할아버지가 늘어놓는 근거 없는 목격담은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여기서 검증해야 할 대상과 믿어버릴 대상을 가르는 기준은 논리가 아니라 익숙함이다. 공교롭게도 이 이중잣대는 영화 밖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지난 20일, 이동진 평론가의 블로그에는 장문의 해명 글이 올라왔다. 앞서 그는 <호프>에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를 주며 "기괴한 난장판 속에서 대담하게 질주하는, 영화 전체가 거대한 크레센도"라는 한줄평을 남겼는데, 일부 관객이 '그가 나홍진과의 친분이나 이해 관계 때문에 높은 평가를 한 게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지적이 계속되자, 이동진 평론가는 결국, "커피 한 잔 나눈 적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해명까지 내놓아야 했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이 정체를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외계인을 사냥했듯, 현실의 일부 관객들도 평론가의 말을 제대로 듣기보다 먼저 그를 향해 돌을 던졌다. 영화가 들이민 '배타성'이라는 문제가 스크린 밖에서도 적용된 셈이다. 결국 <호프>는 영화 안팎에서 '다름에 대한 포용성 부족'이라는 동일한 한계를 증명하는 장이 되었다.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이 모든 배타성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좁혀진다. 왜 우리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잠깐도 멈추지 못하는가. "뭣이 중헌디?"라는 <곡성> 효진의 일침이 <호프>에서도 유효하다면, 그건 이 영화가 찰나의 섣부른 판단 하나가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오는지, 그 나비효과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쏴 죽여야 할 괴물인 줄 알았던 외계인의 눈물을 보고, 흠칫 동요하며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범석의 1초는 그래서 더 눈에 띈다. 물론 이 망설임은 결말을 바꾸지 못했지만, 그런데도 영화가 굳이 이 순간을 붙잡아 보여준 이유는 결과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연민 자체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는 역설적으로 이 망설임조차 허락하지 않는 맹목적인 태도가 어떻게 비극을 낳는지 꼬집는 것이기도 하다.

이동진 평론가를 향해 쏟아진 지적도, 마을 사람들이 낯선 존재에게 겨눈 총구도, 결국은 같은 조급함에서 나온다. 판단부터 내리고 이해는 나중으로 미루는 조급함이다. <호프>가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해결책이 아니라 다시 질문이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 우리에게는 정말 1초의 여유조차 없는 걸까.
덧붙이는 글 이 칼럼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글쓴이(이인혜)는 12년차 대중문화 에디터입니다.
영화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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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라이프스타일 분야에서 에디터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 잡지와 온라인 매체, 브랜드 콘텐츠 등 다양한 채널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획하고 다듬는 일을 해왔다. 퇴근 후에는 늘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청자이자, 장면과 장면 사이에 남은 감정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은 에세이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