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범죄 조직의 하부 조직원 야마시타는 여덟 살 난 딸 마리가 잔혹하게 살해 당한 뒤 복수를 다짐한다. 그는 정체불명의 수학 교사 니지마의 도움을 받아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찾아낸 이는 야마시타와도 연이 있는 범죄 조직의 조직원 오츠키. 두 사람은 오츠키를 납치해 버려진 폐창고로 끌고 가 쇠사슬로 묶어 둔다.
이후 야마시타는 폐창고를 지키고, 니지마는 수학을 가르치러 밖을 오간다. 오츠키에게는 물은 물론 제대로 된 음식도 주지 않고 화장실조차 보내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마침내 오츠키는 같은 조직의 고위 간부 히야마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를 폐창고로 끌어오게 만든다.
그렇게 오츠키와 히야마가 나란히 쇠사슬에 묶인다. 그러나 야마시타와 니지마는 오츠키를 풀어 줄 생각이 없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자신은 마리를 죽이지 않았고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자신들보다 더 윗선의 간부를 지목한다. 복수는 끝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더 깊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영화 <뱀의 길>의 한 장면.
디오시네마
복수는 정의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초기 대표작들이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 잇따라 개봉했다. <큐어>를 시작으로 <차임> <회로>에 이어 <뱀의 길>까지 관객을 찾았다.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아닐지라도, 특유의 차갑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매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영화다.
야마시타는 감정에 휩쓸려 행동한다. 웃다가도 울부짖고,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다. 반면 니지마는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수학 문제를 풀듯 상황을 분석하고 용의자들을 다룬다. 그래서 영화의 중심은 딸을 잃은 아버지 야마시타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니지마에게 더 기울어 보인다.
감정과 이성이 뒤엉킨 이 복수극은 묘한 역설을 만든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인간의 존엄을 빼앗긴 채 점점 초라하고 애처롭게 변해 간다. 반대로 복수를 실행하는 피해자들은 점점 더 잔혹하고 냉혹한 존재처럼 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잡혀온 이들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조차 없다는 점이다. 복수라는 명분 아래 그들은 그저 '나쁜 놈'으로 규정될 뿐이다.
밥도, 물도, 화장실도 허락 받지 못하는 상황은 인간의 존엄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가장 원초적인 고문이다. 그런 폭력을 피해자가 행사하는 순간, 그들 역시 또 다른 가해자이자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이다. 영화는 복수가 과연 정의를 회복하는 행위인지, 아니면 폭력의 굴레를 이어 가는 또 다른 범죄인지를 끝없이 묻는다.
▲영화 <뱀의 길>의 한 장면.
디오시네마
'뱀의 길' 끝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본성
제목인 '뱀의 길'은 여러 의미를 품는다. 야마시타와 니지마는 이미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 뱀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선을 지키려 애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무는 것처럼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가 되는 순환이 이어진다. 그 끝에는 승자도, 정의도 없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질 뿐, 더 이상 복수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이 작품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악순환을 차갑게 응시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학 교사 니지마라는 존재는 유독 인상적이다. 수학은 가장 이성적인 학문이며, 정답만을 향해 나아간다. 니지마 역시 모든 상황을 하나의 공식처럼 계산하고 움직인다. 가해자를 붙잡아 잔혹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일조차 논리적인 결과처럼 받아들인다. 영화는 그 모습을 통해 감정에 휘둘리는 폭력만큼이나, 감정을 완전히 제거한 이성 또한 얼마든지 잔혹한 범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며 수많은 수작을 남겼다. 그중 상당수가 공포와 호러 장르였지만, <뱀의 길>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차갑고 묵직한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빛난다. 28년 만의 국내 첫 정식 개봉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복수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그 서늘한 질문을 끝까지 견뎌 볼 만한 작품이다.
▲영화 <뱀의 길> 포스터.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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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죽인 범인을 찾는 남자, 복수는 결국 괴물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