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호프>가 개봉 닷새 만에 관객 200만 명을 모으며 올해 최단 기록을 세웠다. 제헌절 연휴와 맞물린 흥행 곡선만 보면 완벽한 복귀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프>가 관객에게 던진 것은 감탄이 아니라 "내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가"라는 당혹감에 가깝다.
그 당혹감을 다의적 해석의 여지로 포장하기 전에, 이 영화가 정말로 서사적 완성도를 갖췄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영화 '호프'의 스틸컷영화 '호프'의 스틸컷
플러스엠
전작을 움직였던 힘, '왜'가 사라졌다
나홍진의 전작들을 다시 떠올려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인물들이 극한까지 내몰리는 이유가 언제나 선명했다는 것이다.
<추격자>의 전직 형사는 자신이 팔아넘긴 여성이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죄책감과 마지막 책임감 때문에 밤새 도심을 뛰어다닌다. <황해>의 택시기사는 빚에 짓눌려 청부살인을 떠맡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아내를 찾겠다는 절박함이 폭력의 동력이 된다. <곡성>의 순경은 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리자 미신과 이성 사이에서 무너지며 딸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시도한다. 이 세 작품 모두 "왜 이 인물은 이렇게까지 하는가"에 대한 답이 관객의 몸을 영화에 묶어두는 힘이었다.
<호프>에는 그 '왜'가 보이지 않는다.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고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는 동안, 정작 인물들이 왜 그토록 목숨을 걸고 뛰어다니는지에 대한 감정적 근거는 희미하다. 사건은 발생하지만 그 사건에 대한 인물의 내적 필연성이 뒤따르지 않는다. 액션은 인물의 절박함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의 설계도에서 태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아쉬운 지점은 결말부다. 외계 존재를 둘러싼 사연이 충분히 쌓이기도 전에 이야기는 서둘러 봉합된다. 왜 이 생명체가 지구에 왔는지, 왜 인간과 얽히게 됐는지, 그 관계가 왜 비극으로 끝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생략된 채 정서적 여운만 남기려 한다. 동기가 빠진 자리를 이미지와 음악으로 메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의 진폭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든다.
▲영화 '호프'의 스틸컷.영화 '호프'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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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은 남았지만 세계관은 비어 있었다
크리처 디자인 역시 낯익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거대한 몸집과 인간형 골격을 결합한 외계 생명체의 형상은 이미 여러 할리우드 프랜차이즈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조합의 변주에 가깝다. 독창적인 생명체를 설계하기보다 익숙한 이미지들을 짜깁기해 규모감을 만들어낸 흔적이 역력하다.
이 지점에서 한국형 SF 장르가 반복해서 부딪히는 벽이 드러난다. 한국 SF 영화들이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고전하는 이유는 기술력의 부족이라기보다, 스스로의 세계관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검증된 해외 문법을 답습하는 데 있다.
낯선 존재와 낯선 세계를 설계하려면 그 세계만의 논리와 동기를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하는데, 상당수 작품은 익숙한 레퍼런스의 표면만 재조합하는 데 머문다. 결과물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왜 이 세계가 이렇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내적 설득력은 비어 있다.
<호프>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규모와 스펙터클을 향한 야심은 분명하지만, 그 스펙터클을 뒷받침할 고유한 세계관과 인물의 동기를 충분히 벼려내지 못했다. 벤치마킹한 이미지들을 조립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미지들이 왜 이 이야기 안에서 필연적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물론 액션 연출 자체의 밀도는 인정할 만하다. 추격전의 리듬감과 촬영의 완성도는 한국 상업영화의 기술적 성취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락적 쾌감과 서사적 카타르시스는 별개의 문제다. 몸이 반응하는 순간은 많아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드물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허탈함의 실체에 가깝다.
▲영화 '호프'의 포스터영화 '호프'의 포스터플러스엠
열린 결말과 빈 서사는 다르다
지금 온라인을 채우고 있는 '해석 전쟁'은 이 허탈함을 다른 방식으로 증언한다. 외계 아이가 인간과 외계 문명을 잇는 희망이라는 해석, 주인공이야말로 외계의 후손이라는 해석 등 다양한 독법이 쏟아지지만, 이는 영화가 풍부한 다의성을 품고 있어서라기보다 서사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빈틈을 관객이 각자 메우고 있는 것에 가깝다. 열린 결말과 불친절한 결말은 다르다.
동기가 실종된 이야기를 두고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힌다"는 평가를 다의성의 증거로 세우는 것은 위험한 관성이다. 그런 관성이 굳어지면 인물의 내적 필연성을 벼려내는 대신 모호함을 남겨 논쟁을 유발하는 편이 오히려 화제성과 흥행에 유리하다는 그릇된 학습이 산업 전반에 퍼질 수 있다. 그것은 장르의 성숙이 아니라 퇴행이다.
'호프'의 흥행 곡선이 앞으로도 이어질지는 예매율과 입소문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흥행 스코어가 이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를 대신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단기적 화제성과 장기적으로 신뢰받는 한국형 SF의 토대는 다른 층위의 문제이며, 후자를 위해서는 스펙터클보다 먼저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목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호프'가 정말 한국 영화의 희망이 되려면, 지금 이 작품에 빠져 있는 '왜'부터 되찾아야 한다. 규모와 기술은 이미 충분히 증명됐다. 남은 과제는 그 규모를 정당화할 이유, 즉 인물과 세계를 필연으로 묶어주는 동기를 스스로의 언어로 써내려가는 일이다. 그 숙제를 풀지 못한다면, '호프'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을 가리키는 표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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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거야?" 질문만 무성한 <호프>, 그 허탈함의 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