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배 될 것" 저주받던 소녀, 일본 극우와 맞서 싸운 투사가 되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397] 230회 독립영화 쇼케이스 <호루몽>

국가가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지금으로부터 백수십 년 전, 구한말 한반도 사람들은 오직 살기 위하여서 국경을 건너 생면부지의 나라로 나아갔다. 육로로 러시아 땅 연해주나 청나라 만주 땅으로, 뱃길로 청나라 상하이로 향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밖에 또 하나 열린 길이 있으니 남으로 일본 오사카에 닿는 길이었다. 조선 땅엔 농사지을 땅이 없고, 있어도 악덕지주에게 죄다 빼앗기며, 기근에다 토질까지 좋지 않아 살아갈 길이 막막한 이가 수두룩했다. 국가는 흔들리고 산업은 일어나지 못하여서 땅 파 먹고 사는 것 말고는 따로 입에 풀칠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이들이 나라 바깥으로 나아간 건 나라가 제 백성을 살지 못하도록 한 때문이었다.

자이니치는 재일 조선적 외국인이다. 일본에 산다 하여 '재일'이고, 조선국적을 갖고 있다 하여 '조선적'이며, 그래서 일본인이 아니므로 '외국인'인 이들이다. 자이니치는 다른 외국인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들의 모국인 조선이 망했고, 한반도엔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가 들어선 때문이다. 한때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대한제국을 멸망케 한 일본이 한반도를 병합하며 강제로 일본국적을 부여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 뒤 이들에게 강제했던 국적을 일방적으로 회수했다. 그렇다고 돌아갈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로써 자이니치는 일본 땅에서 사는 나라 없는 외국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국과 북한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양국 국적을 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이 중 어디도 택하지 않은 이들이 더욱 많았다.

역사가 정리하지 않은 자이니치의 문제를 오롯이 감당하는 건 자이니치, 그들 자신이다. 일본인이 받을 수 있는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건 물론, 법적 공백 상태에서 받을 수 있는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의료와 교육 등 공공서비스에서 이 같은 차이는 두드러진다. 취업과 진학에 있어서도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흔하다. 뿐인가. 일본에서 살면서도 일본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저 나름의 문화를 고집한다는 혐오가 일어나기도 한다. 십 수 년 전부터 크게 일었던 일본 내 반한혐오 물결에서 이들은 주요한 타깃이 되어왔다.

호루몽 스틸컷
호루몽스틸컷한국독립영화협회

색깔 확실한 다큐를 만나는 귀한 자리

7월 14일 서울 홍대입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230회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서 <호루몽>이 상영됐다. 지난해 22회 EBS국제다큐영화제 대상 수상작으로,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애호가들에게 일찍부터 관심을 모은 <호루몽>이다. 검증된 작품성에도 독립영화 특성상 아직 정식 극장개봉 기회를 잡지 못한 탓으로,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창구가 제한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와중에도 여느 때 못잖은 관객이 상영관에 들어찬 걸 보면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영화는 자이니치 3세 신숙옥의 이야기다. 조부모 대에 한국서 건너온 노동자들의 자손으로, 그 시절 많은 자이니치가 그러했듯이 그들 사이에서 결혼이 이뤄지며 오늘에 이르렀다. 다른 자이니치가 대개 그러했듯, 멀쩡한 직장을 갖지 못해 가난했고 배움을 얻을 수 없어 무지했던 이들이다.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자랐으나 일생 자이니치란 딱지를 떼지 못한 건 주인공인 신숙옥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희망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듯했던 학창시절을 건너, 보기 드문 성공을 이룬 젊은 시절, 그리고 사회운동에 투신해 뚜렷한 족적을 새긴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내보인다.

감독은 이일하, 지난해 독특한 다큐멘터리 <청년정치백서-쇼미더저스티스>를 선보인 이다. 거의 상영기회를 잡지 못하고 사라지긴 했으나, 극좌와 극우라 해야 좋을 두 청년 정치인을 대비시켜가며 한국 정치판의 면모를 더듬어간 시도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단순히 설정만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형식과 편집 등에 있어서도 감독의 개성이 엿보이는데, 그 유효함과는 별개로 관객과의 접점을 선제적으로 마련하려는 적극성이 각별히 눈길을 끈다(관련 기사 : 20대 국회의원 '0명', 그러니까 한국이 문제다).

신작 <호루몽>에서도 그와 같은 특징이 엿보인다. 영화는 시종 박진감 있는 북소리를 배경으로 신숙옥의 삶을 재구성한다. 천방지축 골목대장이던 어린시절엔 스스로가 자이니치란 걸 알고 적극적으로 그를 주변에 알렸다고 했을 만큼 남다른 기개를 가졌던 신숙옥이다. 선생님조차 그녀를 감당하지 못해 "너는 반드시 불량배가 될 것"이라고 저주 가까운 말까지 했었다고.

호루몽 스틸컷
호루몽스틸컷한국독립영화협회

"처녀성을 1000만 엔에 팔겠어요"

그러나 자이니치란 정체성은 그녀 홀로 거침없이 살아간다고 극복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엔 사회에서 자리 잡은 어른이며 선배가 전무했고, 진학부터 취업까지가 일본인만큼 쉽게 해결되지 않는단 걸 어린 그녀 또한 분명히 알았다. 많은 자이니치가 불량배가 되고, 몸을 팔고, 파칭코를 전전하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의 삶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는 그대로 그녀의 굴레가 될 터였다.

희망 없는 삶이란 견디기 어렵다. 삶을 포기한 어머니와 가족을 내팽개친 아버지,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 가운데 절망에 휩싸인 신숙옥은 알고 지내던 옌예기획사 관계자에게 연락을 해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는 '내 처녀성을 1000만 엔에 사줄 사람을 찾는다'고 말한다. 삶을 내던지는 마음으로 던진 제안이 꽉 막혔던 신숙옥의 삶을 풀어낼 줄 뉘 알았으랴.

남달랐던 유년기, 답답했던 학창시절, 모델을 거쳐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은 청년기,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인간 신숙옥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처럼 보인다. 배움이 깊지도, 거창한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신숙옥이지만 빼어난 외모와 당당한 성품, 그리고 기막힌 운까지가 더해지며 오늘의 그녀를 이뤄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진즉에 고꾸라졌을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극복한 모든 역경은 자산'이라는 니체 철학의 현신처럼 그 모두를 자양분 삼아 오늘에 다다른다. 소위 '먼치킨' 캐릭터를 보는 듯이 온갖 역경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가는 신숙옥을 보고 있자면 어딘지 호쾌한 느낌까지 든다. 이것이 영화가 시종 리드미컬한 북소리를 삽입한 이유이기도 할 테다.

호루몽 스틸컷
호루몽스틸컷한국독립영화협회

성공한 사업가에서 거침없는 활동가가 되기까지

신숙옥의 개인적 삶과 자이니치란 사회적 의제는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영화는 이 문제가 발화하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닥쳐온 위기와 선택, 오늘에 이르는 일련의 이야기까지를 거침없이 풀어낸다. 시작은 2000년이다. 인재육성 컨설턴트란 이름으로 여러 기업을 상대로 채용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던 유망한 사업가였던 그녀가 도쿄시장격인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지사의 망언에 적극 항의하면서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 내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대만인 등을 싸잡아 부르던 멸칭 '삼국인'이란 표현을 써가며, '대지진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이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킬 수 있으니 자위대가 나서야 한다'는 망언을 해 논란이 됐다. 이에 자이니치 출신으로 성공한 인사였던 신숙옥이 공식적인 항의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길로 고객 기업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사업이 기울었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신숙옥이 이 사건 이후 아예 일본사회의 혐오와 차별 문제에 적극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로 거듭나는 과정, 때마침 일어난 극우의 준동으로 그녀가 이들의 타깃이 되어 고통을 겪는 모습 등을 여러 영상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다. 결정적인 사건은 일본 기업 DHC가 소유한 DHC텔레비전이 제작한 프로그램 <뉴스 여자>가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소개하며 신숙옥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다. 이 방송 이후 극우세력에게 좌표가 찍힌 신숙옥은 살해협박을 받는 등 고통을 겪다가 멀리 독일로 몸을 피한다.

영화 후반부는 그녀의 도피와 복귀, 그리고 DHC텔레비전을 상대로 한 4년간의 소송, 마침내 얻어낸 승소까지의 과정으로 채워진다. 전반부가 인간 신숙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준다면, 후반은 그녀의 활약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보통 사람은 해내기 쉽지 않은 그 과정을 건너는 신숙옥의 모습이 보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길 만큼 감격적이다.

영화 속 신숙옥은 마치 무협지 주인공을 보는 듯 당차고 거침없다. 은원을 잊지 않는 협객이 저를 가로막는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넘기듯, 거물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모든 문제를 돌파해나간다.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 DHC 텔레비전 사장, 그녀를 조롱한 <뉴스 여자> 진행자 및 패널들, 혐오를 감추지 않는 극우인사들까지 모두가 그녀 앞에선 조잡하고 비루하게 보일 뿐이다. 신숙옥이 있어 <호루몽>은 호쾌한 영화이며, 그녀의 독보적 캐릭터에 의지해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설득해낸다.

호루몽 포스터
호루몽포스터한국독립영화협회

보기 드문 인물이 주는 각별한 매력

다만 주인공의 매력과는 별개로 감독의 연출이며 다큐의 구성이 마땅한 성취를 거두고 있는지 의문이다. 삽입된 북소리의 리듬감과 중간중간 들어간 한복 입은 여성들의 춤사위가 영화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증진케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필요한 감각을 깨워낸다고 보기도 어렵다.

구조적으로도 영화는 신숙옥뿐 아니라 그녀의 부모와 조부모까지 3대의 역사를 아우르는 설명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종으로는 3대의 이야기가, 횡으로는 신숙옥의 개인사며 중심이 되는 소송과정이 연달아 등장해 관객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난잡하게 내보인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어느 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욕심 때문이었겠으나, 그 탓에 관객은 모든 것이 강조된 나머지 어느 하나도 강조되지 않은 듯한 어수선함을 느끼게 된다.

제목이 된 '호루몽'조차 당시 일본 내 조선인들이 일본인이 먹지 않고 버린 내장 부위를 주워 구워먹던 요리 '호르몬'에서 차용한 것인데, 막상 영화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 같이 작은 요소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품어가고 싶다는 감독의 욕심이 영화 내내 가득 엿보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장치며 설정, 구조가 과연 관객에게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대개는 그 과함으로 달성할 수 있었을 미덕조차, 이를테면 관객이 다큐가 내어준 여백을 통해 스스로 사고할 수 있을 가능성을 상실케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다. 전작에서도 너무 많은 장치가 도리어 어수선한 결과물을 만들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번 영화 또한 감독이 도리어 영화의 장점을 가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루몽>은 매력적인 영화다. 그 매력의 십할 중 십할이 오롯이 주인공 신숙옥에게서 나온다. 그 드문 기질과 기개는 삶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비범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이로부터 관객은 신숙옥이 되지 못한 아마도 대다수의 자이니치의 처지와 그를 그렇게 방치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도 해야겠으나, 또한 다루는 주제나 역경의 무게에 매몰되지 않는 영화적 재미 또한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 <호루몽>의 각별한 매력이 아닌가 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독립영화쇼케이스 한국독립영화협회 호루몽 이일하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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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